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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Dec 10. 2017

말 없는 사랑을 생각하며

지금 내게 필요한 사랑의 정의





위로해야 할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하지만 깊은 슬픔 한가운데 있는 사람 앞에서 나는 아직도 적절한 말을 못 찾고 웅얼거리다 아무 말을 내뱉곤 한다. 가장 좋은 말들을 모아 가장 좋은 때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면 나는 얼마나 더 자라야 할까. 나이가 들수록 위로가 점점 어려워진다.

함께 기뻐하는 건 잘할 수 있는데, 함께 슬퍼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진심은 길게 설명할수록 가벼워지는 걸까. 아니, 긴 설명이 필요한 마음이라면 애초에 진심이 아니었던 게 아닐까. 위로에도 실력이 있다는 걸 요즘 느낀다. 나에게는 그런 힘이 없는 것만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겪은 슬픔은 내게도 무겁게 전해진다.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는 울고 싶어도 꾹 참아야 할 때가 있지만 나는 불과 얼마 전에도 방정맞게 엉엉 울었다. 상처를 감싸는 말, 힘을 주는 말, 슬픔이 깃든 그늘에 온기가 되는 말을 건네고 싶다. 나는 달을 보듯 그의 한 면만을 바라볼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응달에 대해 섣불리 추측하지 않으면서도 사려 깊고 따뜻한 말을 찾아 안아주고 싶다.


무심하지 않으면서 과하지도 않은, 상대가 딱 원하는 만큼의 위로를 건넬 수 있는 둥그렇고 따뜻하며 완전한 어휘가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 게 있다고 해도 무작정 흉내내기엔 내겐 모서리가 너무 많아 어색할 게 빤하다.


상대방을 위하는 진심보다 그 진심을 잘 전해야 한다는 부담이 더 클 때 설명이 길어진다. 사랑한다면 핀 조명을 비추듯 그를 오롯이 바라봐야 하지만, 나는 그 빛을 끌어와서 나 하나만 비추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널 사랑하는 나' 혹은 ‘잘 위로하는 나’로 보이고자 더 몰두한 건 아닐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을 찾다가 이것조차도 적절치 않은 것 같았다. 좋은 표현에 대해 오래 고민했는데 사실 어떤 말보다 가장 분명한 위로는 경청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슨 말이든 들어주고, 침잠한 슬픔으로 말이 없어도 그 여백을 함께 견뎌주는 것. 내가 그토록 찾았던 위로와 진심의 완전체란 따뜻한 침묵과 눈빛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더 이상 실수할 일도 없을 것이다. 말을 예쁜 포장지처럼 쓰지도 않을 것이다.






사랑의 표현에는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사랑은 뚜렷한 행동과 결정으로 나타나는 고도의 절제력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폭발하는 애정을 쏟아내고 싶어도 상대방의 리듬을 먼저 생각하며 천천히 발을 맞추는 것이다. 날카롭고 예민한 날에도 쉽게 거친 말을 뱉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것이다. 갈등이 생겼을 때 잠시 화를 참고 나에게서 먼저 원인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깔끔하게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나에게는 의욕적인 어떤 일이 상대방에게는 불편이나 부담이 된다면 기꺼이 참는 것이다. 상대방의 반응에 내 자존감을 걸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고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새롭게 사랑의 정의를 내린다면, 평형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실한 의지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그래서 어렵다. 내게는 스스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길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행위와 결정들에게서 사랑을 읽는다. 말보다는 단단한 의지를 통해 사랑을 확인한다. 일상에서 더 많은 사랑의 증거를 발견하여 금방 행복해진다. 그렇게 쌓인 작은 사랑의 기억은 위기를 만났을 때 큰 힘이 될 것이다.





사랑을 어떻게 유지하고 표현할지 나름의 해답들을 찾아봐도 근본은 결국 '감정의 조절'에서 출발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떤 감정을 잡아두고 어떤 마음을 내보내야 할지 아는 것이 사랑이라고 점점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고마움과 미안함은 남김없이 표현하고, 화가 나거나 불평이 생길 때면 감정과 사실, 의견을 분리하는 연습을 해본다.


물론 분노를 부정하진 않는다. 화는 감춰졌던 갈등이 드러나게 하며 그 원인과 해결할 방법을 찾을 계기를 만들어준다. 하지만 지나친 분노는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화가 나면 이것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생각한다. 내가 화가 났다는 걸 꼭 감정을 다 드러내며 말할 필요는 없다. 혼자 감정을 풀면서 덜어내고 사실만 표시하면 더욱 확실히 전달되는 것 같다. 화만 내는 것보다 갈등 해결에 더 큰 도움이 된다.

솔직한 감정을 억누르거나 가면을 쓰겠다는 말이 아니다. 사랑한다면, 가까이 있다면 적어도 그를 내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말은 가장 쉽고 즉각적인 표현 방법이지만 그래서 가벼워지기 쉽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또 조금씩이라도 성장하도록 나는 침묵을 더 배워야 한다. 멈춰서 생각해야 한다.





많은 말로 사랑을 전하려는 얄팍한 마음을 내려놓는다. 가까운 사람들의 슬픔과 고독을 헤아리되 그것에 대한 질문은 되도록 적게 할 것이다. 함께 견디는 방법에 대해 더 고민해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원할 때 닿을 수 있도록 언제나 지척에 머물겠다. 감정이 나를 지나쳐 제멋대로 앞서 갈 때, 오직 내 상태만 의식할 때, 가만히 멈추고 너의 마음을 생각 해보리라. 내 짐이 너무 무거워졌다면 바로 불평하기보다는 함께 나눠지길 정중히 요청해야지.


누군가를 만나 실컷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돌아보면, 이따금 부끄러움이 울컥 올라온다. 요즘은 자꾸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것 같다. 많을수록 빈곤해지는 공허한 말들. 이 속에서는 내가 꿈꿨던 사랑이나 위로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이천 년 전 태어난 신의 아들은 어쩌면 그렇게 고요히 세상에 왔을까. 그가 가르쳐준 사랑이 얼마나 잠잠하며 강력했는지 새삼 생각해본다. 결국 조용한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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