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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Jun 05. 2016

우연히 만난 연두색 애벌레

너는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2009년의 가을이었다. 

친구와 쌈밥집에 갔다. 한 상이 가득 차려지고 나는 이야기를 나누다 상추를 한 장 들고 물기를 탁탁 털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멈칫했다. 방금 뭔가를 본 것 같은데. 천천히 상추를 뒤집었다. 뒷면에 작은 애벌레 하나가 붙어있었다. 어릴 때 자연관찰 책에서 보던 전형적인 애벌레의 형상이었다. 여러 마디로 이루어진 연두색의 작은 몸. 처음엔 징그러웠는데 뭐랄까, 볼수록 귀여웠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만난 게 아닐까? 데려다가 키워볼까?

상추에서 벌레가 나왔다고 하니 사장님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따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비닐봉투 하나만 주세요."

나는 상추와 애벌레를 봉투에 담아 집에 가지고 왔다. 


당시 나는 언니네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깨끗한 페트병에 상추와 애벌레를 넣으니 언니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얘는 무슨 애벌레야? 크면 뭐가 되는 거지?"
"글쎄. 아마 나비가 되지 않을까? 아무렴 어때!"

나는 애벌레 사진을 찍어서 나의 새로운 친구라며 미니홈피에 올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가 채소 노점이 있던 자리를 샅샅히 살폈다. 그리고 상태가 괜찮은 배춧잎이며 상추 같은 걸 주워서 돌아왔다. 애벌레는 왕성하게 이파리를 먹어치웠다.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기분이 좋았다. 

1차 탈피를 거치자 애벌레의 덩치가 커졌다. 그리고 전보다 더 많은 먹이를 먹어치웠다.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니 키울 맛이 나더라. 변하면 또 변하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연애도 안 하고 딱히 일도 없던 한가한 시절, 나는 운명의 '애완충'을 키워내는 재미에 푹 빠졌다. 





(당시 미니홈피에 올렸던 사진들. 유치한 말풍선이 몹시 거슬리지만 용기 내어 올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애벌레가 통 먹지 않고 가만히 있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죽은 건 아니겠지? 조금 더 들여다보다 알게 되었다. 고치를 틀고 있던 것이다. 작고 귀여웠던 애벌레가 곧 성충이 된다니! 언니도 이따금 내 방에 들어와 신기하게 지켜봤다. 

"뭐가 될지 궁금하지 않아?"

"글쎄. 백과사전에서 보던 나비 애벌레처럼 생겼으니까 아마 예쁜 나비가 되지 않을까?"

뭐든 상관없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나는 당연한 듯 나비를 기대하고 있었다. 날이 추워져서 이제 꽃도 없는데 나비가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기까지 했다. 

고치는 더 짙고 단단해졌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성충이 나오길 기다리고 기다리다 존재를 가끔 잊어버릴 만큼 꽤 긴 시간이 지났다. 


외출하고 돌아와 방에 불을 켰다. 습관처럼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애벌레 집을 보았다. 

"으악!"

깜짝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페트병 안에는 크고 징그럽게 생긴 나방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있었다. 내 기척을 듣고 언니가 들어왔다. 

"어머! 나방이 됐네? 정말 신기하다!"

그리고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를 보며 한 마디 더 보탰다.

"이번에는 사진 안 찍어?"

그 말을 듣고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게. 나는 왜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언니가 나가고,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는 대체 뭘 기대했을까. 그토록 공을 들이고 관심을 쏟았으면서 이렇게 한 순간에 태도가 바뀐 이유는 뭘까. 어째서 나비는 허용되고 나방은 거부감을 일으킨 걸까. 나는 왜 애벌레가 나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나방의 사진은 왜 찍고 싶지 않았을까. 


그 순간 내 안에서 시커멓게 굳어버린 편견이 보였다. 나비는 익충이고 나방은 해충이라는 건 인간이 만든 기준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나방이 인간에게 실제적인 해로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나비는 나비의 삶을, 나방은 나방의 삶을 살 뿐이다. 모든 생명은 꾸준히 성장하며 자기 생을 충실히 살아내고, 누구도 그 종류에 따른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 생명에 대해 너는 귀하고 너는 천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명백한 진리인데 나는 후천적으로 학습된 불완전한 기준에 따라 반응하고 말았다. 나는 언제부터 생명의 귀천을 따지게 되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을까. 그저 힘을 다해 살아낼 뿐인 각각의 인생을 내 편견에 따라 마음대로 평가하진 않았을까. 글을 쓰겠다고, 그것도 동화를 쓰겠다고 했지만 이렇게도 자격 없는 인간일 줄은 몰랐다. 

내 실체를 깨달으니 부끄러운 마음이 드러났다. 직면은 역시 아픈 일이다. 나는 조금씩 눈물을 흘리다가 이내 바닥에 엎드려 울음을 뱉어냈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조건과 상황에 상관없이 모두가 가치있고 귀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좋은 생각을 갖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평등을 생각만 하는 것과 평등을 실천하며 사는 것도 그러하다. 얄팍한 신념 아래에는 텅 빈 구멍 뿐이었고, 그걸 발견하자 내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무의식 중에 드러난 반응을 통해 내가 얼마나 껍데기 뿐인 인간이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울음이 쉽게 멎지 않았다. 


나방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생명이다. 그 귀여웠던 애벌레는 고치 안에서 죽음 같은 시간을 보내며 최선을 다해 날개와 다리를 만들었다. 나방의 무늬가 징그럽게 느껴졌던 것도 편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시 보니 화려하고 멋진 디자인이었다. 나였다면 절대 생각해내지 못했을 개성있고 아름다운 디자인. 비로소 나방이 기특해 보였다. 


나는 페트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늦은 밤이었다. 덮어놓았던 뚜껑을 벗기고 살살 흔드니 나방이 밖으로 나왔다. 나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나방을 날려주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나방은 생애 최초의 힘찬 날개짓을 선보이며 본능을 따라 가로등을 향해 휘청휘청 날아갔다. 불빛에 반응하는 걸 보니 역시 넌 나방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구나. 나도 앞으로 더 인간답게 살아볼게. 편견으로부터 예민해지고 모든 사람과 생명을 귀하게 여길게. 





직업으로서의 목표만 가지고 살다 보면 언젠가 분명한 한계에 부딪친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왜 그렇게 되고 싶은지 스스로 대답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만나도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방 한 마리를 키워 보내며 나는 작은 답을 얻었다. 모든 사람은 소중한 존재이고 나는 그걸 말하고 표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날 밤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후로 7년이 지난 지금, 다시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지. 

적어도 삶의 기준 하나는 분명해졌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은 신념과 실천으로는 여전히 부족해서 부끄러울 뿐이지만, 선입견을 발견하고 고쳐가는 과정이 조금씩 수월해진다.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정이 있어서 그것이 나를 때에 맞게 내리치며 깎아주는 것 같다. 그날의 멋진 나방이 준 선물이다. 

지금 내가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지 헷갈릴 때 가끔 그 나방을 떠올린다. 세상에서 나비처럼, 나방처럼 평가 받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해 말해줘야지. 사람을 나누는 그 평가와 기준이라는 게 얼마나 얄팍하고 무의미한지 알려줘야지. 나부터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해야지.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고 세상도 달라지는 것 같지 않을 때마다 다시 새롭게 다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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