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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Sep 18. 2015

그림책 만드는 아이들

나의 기억을 동화로 만드는 교실

동화는 작가와 독자가 다른 세대층에 있는 독특한 장르이다. 기성세대인 작가가 10년 남짓 살아온 이들에게 건네는 이야기. 재미있는 건 동화의 주 소비자 또한 대부분 어른이라는 사실이다. (대체로 유아들은 부모에 의해 선택된 책을 보는 일이 많죠)


그래서 늘 목말랐다. 동화는 아이들의 삶을 담은 문학인데, 어린시절을 훌쩍 넘어온 어른이 아이의 삶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가 과연 어린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나 역시 동화를 쓰는 성인이기 때문에 더 고민했다. 어른과 마찬가지로 아이의 인생에도 끊임없이 사건이 일어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자기만의 사유를 하기 때문에 나도 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어른도 아이도 모두 사랑 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하니까. 


'완전한 동화'가 존재할까? 소설은 작가와 독자가 비슷한 세대이니 읽고 이해하는 일이 쉽다. 사실 성인이 동화를 쓰는 건 일종의 번역 작업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아이가 직접 쓴 자기 이야기야말로 동화의 완전체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이상주의자 같지만 나는 기회가 닿는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동화를 쓰도록 돕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기회를 얻었다. 








올해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내 미래야 http://www.miraeya.or.kr/index.jsp 에 이따금 직업 체험 강의를 나가곤 했는데, 거기서 먼저 재미있는 제안을 해 주셨다. 동화 창작과 일러스트 강의를 콜라보하여 그림책 만들기 클래스를 열어보자는 것. 더 볼 것도 없이 덥썩 수락했다. 오히려 내쪽에서 더 고마워 해야 할 일이었다. 나 같은 무명쩌리작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다니! 일러스트레이터로 합류하신 김은혜 선생님도 마음이 착착 맞는 멋진 분이셨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하루 2~3시간씩 총 7일. 서울 시내 모든 중고등학생들이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 

이름하야 <솔깃한 X 프로젝트>

동화창작 3일, 일레스트 3일, 마지막 날엔 최종 편집 및 발표. 

사실 기대만큼 걱정도 컸다. 참가비 없이 오직 자발성만 가지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이미 유년기를 보낸 청소년들이 동화에 접근하길 꺼리진 않을까? 단 시간 내에 과연 글을 완성하고 그림까지 그릴 수 있을까? 며칠 내로 글을 완성하는 건 나도 어려운데.



미래야 담당 선생님은 무척 성실하고 적극적인 분이셨다. 그분은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리고, 접수된 신청서를 바탕으로 지원자에게 일일이 통화하여 진심으로 자원하는지, 성실히 참석할 수 있는지 물으셨단다. 그렇게 열두 명이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7월 중순, 거리를 걷기만 해도 땀이 뻘뻘 흐르던 날에 아이들을 처음 만났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물어보니 동화를 써 보고 싶어서 온 아이는 하나 정도 있었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일러스트에 관심이 있어 온 것이라 한다. 예상했던 일이다. 하나 같이 웹툰을 즐겨 보며 각자 나름의 작품 세계를 만들고 있더라. 처음엔 머뭇거리던 아이들은 자기를 '덕후'라고 말하며 서로 '최애캐'를 물어보고 그림도 보여주더니 서로를 '존잘님'이나 '금손'이라 부르며 즐거워 했다. 

이런 단어를 귀로 듣는 건 처음이라 너무 재밌었다. (역시 덕질은 인생의 윤활유!) 




스토리 창작 수업은 총 3회차로 구성했다. 


첫째 날에는 동화의 역사와 의미, 동화작가가 하는 일 등을 프레젠테이션으로 나누고, 자기 기억을 꺼내 담는 시간을 가졌다. 이를테면 동화의 소스를 뽑아내는 작업이랄까. 어떤 경험이든, 기억이든 상관없었다. 기뻤던 일, 깜짝 놀랐던 일, 부끄러웠던 일, 무지무지 열 받았던 일 등을 적어보고 이 중에서 동화로 만들고 싶은 기억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저마다 어두운 기억을 툭툭 꺼냈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외로웠던 일, 따돌림을 당했던 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일, 심지어 특별한 기억이 없어서 쓸 게 없다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니 기억을 꺼내어 적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은 이 이야기를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한 줄로 정리해야 하는데, 기억에 불과한 이야기로 섣불리 주제를 잡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일단 주제는 내일 스토리를 쓰면서 정하기로 했다. 대신 여러 가지 그림책을 감상하고,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했을지 명탐정처럼 추리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글 쓰는 걸 어려워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너희가 그림도 잘 그리는데 스토리까지 잘 쓰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거라 설득했다. (사실 너희들이 부러워... 나도 그림 잘 그리고 싶어ㅜㅜ)




나만 빵 터진 거 아니지? 얘들아...?





둘째 날은 기억을 동화로 바꾸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인칭과 시점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동화와 의인화, 판타지의 예가 될만한 그림책을 보여주며 특징을 설명해 주었다. 특히 중점을 두었던 것은 결말을 실제 경험과 다르게 바꾸는 일이었다. 대부분이 슬프고 어두운 기억을 말하려 했기에 더욱 그랬다. <펠레의 가출>을 읽어주며 이 작가의 어린시절에는 억압과 상처가 있었지만, 정 반대의 동화를 쓰며 그 시절의 자신을 안아주게 되었다고 말해주니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지더라. 그 기억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내 외로움과 분노, 혹은 슬픔이 풀어지는 픽션을 덧붙여 써 보자고, 아니면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라도 해 보라고 독려했다. 사뭇 진지한 분위기였다. 


어떤 스토리를 쓸지 대강 정리한 뒤, 캐릭터와 배경을 구체적으로 적어보았다. 캐릭터와 배경이 분명하면 훨씬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꾸밀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주인공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그 아이가 무슨 얘길 하는지 들어보았다. 사실 이건 내가 즐겨 쓰는 방법이다. 머리속에 주인공의 연령과 성격, 가치관을 구체적으로 그리면 어느 순간 주인공이 말을 툭 건넬 때가 있다. "나 학교 가기 진짜 싫어!" 혹은 "엄마 때문에 창피해서 못살겠다." "친구가 꼭 필요해? 난 없어도 괜찮은데?" (쓰고 보니 다들 까칠하시다..) 뭐 이런 식. 


아이들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돌아다니며 한 사람씩 일대일 피드백을 주고, 각자 스토리를 완성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 집에 보내주었다. 다음 날까지 미루면 내일도 시간이 부족할 테니. 아이들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생동감 있고 재미있었다. 


얼굴의 흉터 때문에 따돌림을 당했던 아이가 당당하게 '다른 건 나쁜 게 아니야'라고 외치기도 하고, 말수가 적어서 오해를 많이 받았다는 아이는 '나는 그냥 낯가림이 심한 것 뿐이야'라고 선언한다. 자꾸 피리를 불어서 시끄럽다고 혼이 난 아이는 밤에 하늘 높이 날아가 자기 연주를 아름답게 들어주는 친구들을 만난다. 언니랑 자꾸 싸우던 아이가 언니의 극적인 도움을 받고 감동을 받는 듯 하지만 그래도 우린 여전히 안 맞는다고 푸념한다.

작가 자신이 작품에 생생하게 드러나서 좋았다. 완성작이 벌써 기다려졌다. 






셋째날. 열 두 명의 아이들이 끝까지 모두 모였다. 

이날은 그림책에 맞는 원고를 썼다. 단 시간 내에 그림책을 완성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총 여덟 장면만 그리기로 결정하고 그에 맞게 원고를 조정하여 썼다. 여기서는 문체와 구성이 중요했기 때문에 다양한 구성을 가진 그림책들을 보여주었다. 동화의 문체는 단정하고 간결한 것이 좋다. 또 비유나 흉내내는 말이 들어가면 더 부드럽고 재미있게 읽힌다. 

어제보다 더 집중도가 높았다. 나는 좀 더 밀도 있는 피드백과 교정으로 도와주면서 끊임없이 아이들을 격려해 주었다.

 "너희는 이미 작가야!" 

드디어 모든 아이들이 여덟 장면으로 구성된 동화를 완성했다. 그리고 준비된 콘티 노트에 정성스레 옮겨 적고 나서 집에 갔다. 대견스러웠다. 






그 다음 주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일러스트레이션 수업이 있었다. 하루에 세 시간. 이번에는 김은혜 선생님의 차례였다. 선생님은 다양한 그림 기법을 설명하고 아이들의 스토리에 맞는 스케치와 채색 작업을 도와주셨다. 듣기로는 아이들이 열정이 대단해서, 일찍 와서 그림을 그리거나 늦게까지 남아 작업하기도 했다고 한다. 선생님도 함께 끝까지 남아 지도해 주셨다고. 




처음에는 너도 나도 쉽게 색연필을 고르더니, 나중에는 물감 채색에 꼴라쥬까지 동원하여 작업했다고 한다.




마지막 날, 모두가 다시 모였다. 

이번에는 나와 김은혜 선생님이 함께 아이들의 편집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파워포인트를 활용하여 그림을 넣고 그 위에 글씨를 입력했다. 그림책은 그림으로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장르이지만, 텍스트 역시 중요하다. 일반적인 책에 비해 그림책의 텍스트는 적당한 폰트 활용과 글 위치, 줄바꿈 등 신경 써야 할 부분이 꽤 많으니까. 

마지막으로 자기 그림 중에서 하나를 골라 표지를 만들고 제목을 붙였다. 마지막 장에는 작가 소개와 하고 싶은 말들을 넣었다. 프로젝트 비용에 한계가 있어 인쇄까진 진행할 수 없었지만, pdf까지만 만들어도 충분히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열두 명의 아이들이 자기 책을 완성해냈다. 



편집까지 척척! 대단해! 스고이!





열심히 작업한 당신, 즐겨라!

미래야에서 조촐한 치킨&피자 파티를 준비해 주셨다. 아이들이 신나게 먹는 동안 돌아가면서 자기 작품을 발표했다. 큰 화면으로 보니 더 멋있더라. 아이들은 서로를 '금손님' '존잘님'이라고 부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와 김은혜 선생님도 이따금 뭉클, 글썽해 하며 발표를 보았다.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준 아이들에게 무척 고마웠다. 게다가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다니.


너넨 감동이었어...




https://youtu.be/CVcv942pcRY








후일담이 있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소문이 좋게 퍼졌는지, 나중에 용산구청에서 직접 취재와 인터뷰를 하셔서 보도자료를 배포하셨다고 한다. 덕택에 관련 기사까지 나왔다. 

그래도 즐겁게 참여한 프로젝트가 좋은 반응을 얻었다니 보람된 일이다. 



비록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십대 아이들이 자기 기억을 대면하고 그것을 동화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내 염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끝까지 성실히 해냈고, 좋은 결과물을 완성했다. 출판해도 될 법한 수작도 보였다. 

아이들이 동화를 쓰도록 돕는 일. 기회가 닿는대로 더 시도해 보고 싶다. 아이들의 가능성은 언제나 생각보다 완전하다. 그 영롱한 가능성에 살짝 올라타 함께 꿈꾸고 싶다. 








-사진 및 동영상 출처-

스스로넷 블로그 http://ssro_net.blog.me



*완성된 그림책을 감상하시려면 (PC권장)

http://ssro_net.blog.me/220443215720


*언급된 기사글을 보시려면 (부끄)

http://me2.do/FCKAXq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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