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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Sep 04. 2015

사랑하는 척

이것도 사랑의 한 종류가 아닐까

결혼하기 전까지 언니 집에 얹혀 살았다. 귀여운 삼 남매와 함께.

형제가 셋 이상인 집에서는 가운데 아이의 삶이 특히 고되다  손윗형제에게 치이고, 동생한테 양보 안 한다고 혼나기 일쑤. 지적 받을 일이 다른 형제에 비해서 많은 데다 형제들과의 관계도 어렵다. 우리집에서 구박을 가장 많이 받는 한음이도 둘째였다. 일곱 살이 될 때까지도 삼 남매 중에서 가장 자주 혼나고 다른 형제들과의 갈등도 잦은 편이었다.


언젠가부터 한음이가 자꾸 움츠려드는 걸 느꼈다. 자주 혼나는 아이들은 으레 그렇다. 나는 속이 상해서 어떻게 이 맘을 풀어줄까 하다가, 그냥 사랑을 충분히 표현해주기로 했다.


"이모는 한음이를 제일루 사랑해!"
"이모는 언제나 한음이 편이야."
그에게 되도록 자주 속삭여주었다. 나중에는 '답정너'처럼 느닷없이 물었다. 그럼 한음이는 씨익 웃으면서 명랑하게 대답했다.

"이모는 누굴 제일 사랑하지?"
"나!!!"
"이모는 누가 제일 멋지다고 생각하게?"
"나!!!"
"어머, 어떻게 알았어?"
(까르르 까르르)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다. 내가 진짜로 한음이를 더욱 사랑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특별히 더 예쁠 것도 없던 말썽쟁이 아이가 계속 눈에 밟혔다. 물론 그 전에도 사랑하긴 했지만, 전보다 진심이 더 동하는 느낌이랄까. 분명 그랬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말이 감정을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사랑하는 척'도 사랑의 한 종류라는 것을.




옴니버스 영화<사랑해, 파리>에서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기혼 중년 남자에게 내연의 여인이 생긴다. 이게 진짜 사랑이라 믿은 그는 아내에게 결별을 고하려고 카페에 자리를 마련한다. 반가운 얼굴로 아내를 만나 막 입을 떼려는데 갑자기 아내가 할 말이 있다며 펑펑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말한다. 지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곧 죽음을 앞둔 사람 앞에서 이혼을 말할 수는 없옸는지 그는 아내가 죽기 전까지만 잘해줘야겠다 생각하고는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보살피며 '사랑하는 척'을 시작한다. 마지막 선의였을 것이다. 그는 매일 아내 곁에서 사랑을 표현하고 온종일 극진히 보살핀다.
그러기를 수 개월, 결국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남자는 가슴 깊이 슬퍼하며 자신이 어느새 아내를 정말 사랑하게 됐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내연녀와 완전히 정리하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사는 것이다.



남편의 연기는 어느 순간부터 진심으로 변했다.





글도 쓰고 이따금 곡도 쓰다보면 자연히 감정에 관심이 간다. 나 역시 마치 촉수가 달린 것처럼 갖은 디테일한 감정을 끊임없이 감각하던 때가 있었다. 감정은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니 감정이 주는 이점을 되도록 많이 누리고 싶다. 그렇지만 현재의 감정이 진실이라 믿고 싶지는 않다.


감정은 사실 얄팍하고 가벼워서 굉장히 쉽게 변하지만, 그럼에도 사유와 판단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날의 감정에 따라 하루가 달라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반대로 감정은 의지에 견인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원한다면 풀어줄 수도, 억누를 수도, 표현할 수도, 증폭시킬 수도 있다. 감정이 나를 따라오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여 사랑이 메마른 시절에 사랑을 일으키고, 불타오르는 미움을 잠시 멈추기도 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우울할 수 있는 사람. 어떤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다가도 제자리를 찾아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랑은 나를 다 주는 일이기 때문에 문득 자신이 소모된 것을 느낄 수도 있다. 감정이 다 식은 듯한 순간 말이다. 사랑해야 하지만 마음이 도통 일어나지 않는 때도 있다. 가족에게 특히 그렇다. 심지어 자녀에게도.

그럴 때 사랑하는 척이 필요하지 않을까. 당장은 진심이 아닌 것 같은 친절한 말 한 마디, 썩 내키지 않지만 한 번 더 표현하는 일. 의지를 가진 행동이기 때문에 처음엔 거짓 같고 연기 같아도 그것은 감정을 이끌고 내면도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찌보면 사랑하는 척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그저 지금은 숨을 고를 시기일 뿐일 지도.  


감정에 이끌리며 살지, 감정을 이끌며 살지는 우리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한음이는 사려 깊고 늠름하며 축구를 굉장히 좋아하는 아홉 살 소년이 되었다. 누나와 동생과도 잘 지내고 부모님을 위로할 줄도 안다. 어릴 때의 말썽에 괜한 걱정을 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묻는다.


"이모는 누굴 제일 사랑하게?"

"...나!" (이젠 좀 쑥스러워 한다)

"딩동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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