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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Nov 16. 2015

다섯 살의 죄책감

그리고 스물 다섯 살의 성장

큰언니가 셋째 아이를 낳았을 때의 일이다. 

친정 엄마는 바빠서 오기 어려우시고, 세 번째 출산인 만큼 몸조리도 신경 써서 잘 해야 하니 언니는 별 수 없이 조리원을 선택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언니의 산후조리를 직접 도울 수는 없지만 남은 두 조카를 돌보는 일을 맡기로 했다. 그때에도 프리랜서여서 딱히 어디에 매인 상태는 아니었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스물 다섯 살, 다섯 살, 세 살.

지금 다시 생각하니 심히 걱정되는 조합이다. 언니는 무슨 용기였는지 나에게 아이들을 다 맡겼다. 그 전부터 함께 살아오긴 했으나 두 아이의 생활을 온전히 홀로 책임지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애를 키워보긴커녕 낳아본 적도 없는 나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매일 아침 일어나 아이들을 깨우고 씻기고 옷 입혀서 부랴부랴 유치원에 보낸다. 아이들이 가고 나면 청소나 빨래를 하고 장을 본다. 하원 시간은 왜 그리 금방 오는지, 뭐 한 것도 없는데 다시 부랴부랴 애들을 데리러 나갔다. 그러면 그 이후부터 다시 전쟁이다. 다시 말하지만 다섯 살과 세 살 아이들이다. 그들은 이 시기의 유아들이 하는 일을 충실히 다 해 주었다. 시끄럽고, 싸우고, 어지르고, 엎지르고, 싸고, 싫증내고, 집착하고, 도망다니고, 장난치고, 장난치며, 오직 장난을 친다. 

어르고 달래는 것도 어느 정도다. 어느 땐가 나는 그야말로 '뚜껑'이 열려서 아이들을 대문 밖에 내쫓을 뻔 한 적도 있다. 울면서 싹싹 비는 모습에 제 정신이 돌아오긴 했지만, 스물 다섯 아가씨의 '엄마 체험'은 고도의 정신력을 요구하는 괴롭고도 고단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많은 부모들이 '욱'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밤이면 아이들을 겨우 재운 뒤에 혼자 자책하며 우는 날이 많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그렇게 화를 내다니. 난 정말 수준미달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놀아주는 일이었다. 동생이 태어났다는 이유로 강제로 엄마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사실 안쓰럽고 가엾었다. 두 녀석들의 스트레스를 좀 풀어주고 싶어서 실내놀이터에 데려가 보기도 했는데, 별천지를 본 듯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렇게라도 엄마 없는 설움을 풀게 해 주고 싶었다. 물론 이따금 조리원에 가서 엄마와 만나게 해 주기도 했다. 면회 시간이 짧아 아쉽긴 했지만. 

그날도 하원하자마자 조리원에 갔다. 산후조리원은 아주 조용히 얘기하고 소리 없이 거닐어야 한다. 하지만 다섯 살, 세 살이 순순히 따라줄 리 없었다. 그날따라 유독 신이 나서 왁자지껄 쿵쿵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는 결국 건물 옥상에 올라갔고 거기서 원없이 뛰어놀게 해 주었다. 그러다 셋이서 함께 술래잡기를 했다. 물론 술래는 나다. '우어어어어'하면서 겁을 주면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도망간다. 우리는 한참을 신나게 뛰어 놀았다. 

그때였다. 첫째가 도망가면서 앞에 뛰어 가던 둘째와 부딪쳤다. 세 살 아기인 둘째는 정면으로 엎어졌고, 금방 일어나긴 했으나 앞니 쪽에서 피가 줄줄 나기 시작했다. 코에도 상처가 났다. 하늘이 노랬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어쩔 줄 모르다가 일단 씻겨야 하니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갔다. 언니도 깜짝 놀라고 둘째는 계속 울었다. 연락을 받고 급히 형부가 달려왔다. 형부는 우리를 싣고 그 길로 병원으로 향했다. 엑스레이도 찍고 이모저모로 살펴봐도 큰 이상은 없단다. 코뼈가 잘못됐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괜찮다고 했다. 우리 모두 한시름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된 하루였다. 


그날 밤. 몸도 맘도 지친 상태로 아이들을 재웠다. 두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몹시 피곤했던지 금방 잠이 들었다. 정말 정신 없는 하루였지. 혼자 되뇌고 있는데 한 아이가 잠꼬대를 했다. 첫째였다. 



나 때문에...
내 동생이 다쳤어...



깜짝 놀랐다. 사실 누구도 첫째에겐 신경 쓰지 못했던 하루였다. 가만히 있길래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첫째는 그 정신 없는 과정을 함께 보내며 내내 자책하고 있었던 거였다. 조리원에서도, 병원에서도, 집에서도 혼자 끙끙 앓았던 것이다. 자기 때문에 동생이 다친 거라고. 첫째 아이는 잠꼬대를 하며 울먹였다. 나도 울컥 눈물이 났다. 자기 손에 넘어진 동생이 피를 뚝뚝 흘렸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나 역시 놀라고 경황이 없어 큰애를 보듬어주지 못했다. 괜찮다고, 동생에게 사과하면 된다고, 놀다 보면 다칠 수 있는 거라고 한 번은 얘기해 줬어야 했다. 


말도 안 듣고 온통 자기 주장만 하는 다섯 살. 사실은 만 3세에 불과한 어린 아이가 비로소 한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미숙하고 어리게만 봤던 다섯 살에게도 반성과 후회, 자기 검열이 있었다. 무의식을 파고들 정도의 끈질긴 죄책감도 존재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여전히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유치하지 않은가. 스무 해를 사이에 뒀지만 우리 둘에겐 큰 차이가 없다. 다 똑같은 인간이었다. 내가 뭐라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혼을 냈을까. 얼마나 대단하며, 얼마나 성숙하다고. 


곤히 잠든 아이들 곁에 누워 천장만 보는 밤. 우리는 이 까만 우주 어디로부터 떨어졌을까. 너희가 태어나기 전에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떠도는 작은 빛은 아니었을까. 그러다 어느 따뜻한 울림에 이끌려 세상에 태어났고, 많고 많은 집 중에서 하필 한 집에서 만났구나. 우리는 다 한 가지 모양으로 탄생한 똑같은 사람. 태어난 순서라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 다만 모두가 본능처럼 부지런히 성장하고 있을 뿐. 그러면 스물 다섯의 나는 또 혼자 훌쩍이며 이리저리 뒤척이는 것이었다. 생명도, 성장도 나로선 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일이었다. 전 세계의 모든 인류가 이 마법 같은 시간을 지나며 기어이 자라는구나. 문득 생을 긍정하게 되었다. 




이제 첫째 조카는 열한 살이 되었다. 커서 이모처럼 동화작가가 될 거라고 말한다. 넘어져서 잉잉 울었던 둘째 조카는 축구와 바둑을 좋아하는 아홉 살 소년이 됐다. 갓 태어나 찡얼거린 막내는 내년이면 초딩이 되는, 엄청난 말썽꾸러기로 자랐다. 우리는 함께 나이 들며 훨씬 다양한 층위의 추억을 쌓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이 아이들 앞에서 어른 행세하는 것이 못내 부끄러울 때가 많다. 그들은 나의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 함께 성장하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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