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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Dec 09. 2015

새 봄을 꿈꾸는 겨울

나의 신춘문예 도전기


초등학교 때부터 문예반에서 활동하고 수도 없는 백일장에 나갔다. 막연하게 작가를 꿈꾸며 결국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지만 항상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발군의 실력을 보이는 학생들은 저만치 따로 있고, 나는 이도저도 못 미치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3학년 2학기 때 처음 동화 수업을 듣고 비로소 내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개론 수업이었지만 기말 과제는 동화 창작이었다. 과제 때문에 쓴 동화. 그게 첫 작품이었다.  


지금은 다문화가정이 흔하디 흔한 소재로 쓰이지만 당시는 이제 막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사실 나는 혈연 중심의 한국에서 혼혈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더 관심이 있었다. 당사자들의 생생한 정보를 얻기 위해 관련 커뮤니티에 가입하기도 했다. 많지 않은 정보와 상상 만으로 한 편 써 놓고 이리저리 들여다 보다 내용을 싹 갈아엎기도 했다. 그래도 시원치가 않았다. 한 편을 완성했다는 뿌듯함보다는 이상하게 수치가 더 컸다. 창피하니 내지 말까. 여러 번 고민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그냥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싸우던 시절이었다. 무엇에든 자신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첫 작품을 제출하고 일주일이 지났다. 교수님은 몇 학생들을 호명하며 수업 후에 남으라고 하셨다. 내 이름도 있었다. 교수님은 우리가 쓴 작품들을 돌려주며 말씀하셨다. 거기엔 몇 가지 조언도 적혀 있었다. 

"이거 신춘문예에 내 보세요."

알고 보니 우린 나름대로 선발된 거였다. 교수님은 신문사마다 중요하게 보는 점이 조금씩 다르다며 우리에게 신문사도 각각 추천해 주셨다. 


신춘문예. 수도 없이 들었지만 당연히 내 몫은 아닐 거라고 여겼다. 등단을 하고 싶긴 하지만 그건 아주 먼 미래의 일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다. 교수님이 그렇게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용기 없는 나는 수년 간 고민만 계속 했을 것이다. 

어쨌든, 제안을 받았으니 도전은 해 봐야지 싶었다. 나는 D일보에 내기로 했다. 기대는 딱히 하지 않았다. 


이듬해 1월 1일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문득 생각이 나서 인터넷 검색을 했다. 혹시 모르니 심사평은 보고 싶었다. 더듬더듬 찾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심사평에 거짓말처럼 내 이름이 올라가 있다. 최종심까지 오른 것이다. (심사평에서는 수상작을 선정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최종심에 오른 작품을 간단히 소개한다) 첫 도전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용기를 더 얻었다. 


그 해 동화 창작수업을 들으며 몇 편을 더 써 보았다. 동화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또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첫 도전에서 최종심에 올랐다는 게 도리어 큰 부담이 되었다. 다음 번에 아예 떨어지면 더 깊이 실망할 것 같았다. 어느새 다시 전처럼 힘을 꽉 주고 글을 쓰고 있었다. 

일 년을 보내며 홀로 수 없는 씨름을 했다. 장르에 대한 호감과 관심으로는 이 길을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한 답을 찾아야 했다. 왜 하필 동화인지. 동화를 써서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째서 등단을 하려는 것인지. 뚜렷한 동기부여가 필요했다. 정작 창작은 잘 하지 못하고 고민들만 끌어안고 살았다. 삶 자체가 자주 휘청거리던 시기였다. 중심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좀 울기도 하다가 정리하는 일을 반복했다. 



또 겨울이 왔다. 이번에는 다른 신문사에 투고하려고 두 편을 더 썼다. 역시 어디 내놓기 창피했지만 그냥 도전 자체에 의의를 두었다. 지방의 한 일간지와 서울에 있는 모 신문사에 원고를 보냈다. 

그러다 작년에 냈던 나의 첫 작품이 생각났다. 처음 완성한 동화. 어차피 떨어졌던 것이니 좀 더 다듬어서 다른 곳에 내 볼까? 교수님의 의견과 작년 심사평을 길잡이 삼아 내용을 다듬고 결말을 새로 썼다. 좀 더 나아진 것 같았다. 다른 곳은 마감이 거의 다 됐고, C일보가 남아 있었다. 접수 마감일이었다. 우편으로 보낼 시간은 없으니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집에 프린터가 없어 동네 피씨방을 전전하며 겨우 출력을 한 뒤, 지하철을 타고 시청으로 갔다. 저녁 6시가 넘었다. 신문사 근처 편의점에서 서류 봉투가 어디 있는지 물으니 점원이 되묻는다. 

"오늘따라 서류 봉투 찾으시는 분이 왜 이렇게 많죠?"

나는 괜히 부끄러워 수줍게 웃으며 오늘이 신춘문예 접수 마감일이라고 말해 주었다. 

경비실에서 접수를 받고 있었다. 나 말고도 몇 명이 더 모여 있었다. 원고 더미 맨 위에 내 원고를 살짝 올려두고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드린 뒤 밖으로 나왔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명동에서 저녁 약속이 있어서 산책하듯 걸어갔다. 작지만 또 하나를 성취했다는 생각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일 년 간의 고민과 실패, 참회와 결단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찬 바람을 맞으니 깨끗하게 새로 씻는 기분이 들었다. 좋은 시간이었어. 




그 후 02-로 시작되는 번호로 전화가 올 때마다 화들짝 놀랐다. 기대를 안 하기로 했지만 기다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02-로 시작하는 번호. 조용히 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기 C일보입니다. 빛보영 씨 되시죠?"

문화부 기자라고 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번에 동화 부문에 당선되셨어요. 어디 중복 투고하시진 않았죠?"

그분은 업무를 위해 전달했지만 나에게는 내내 천둥처럼 들렸다. 주저앉아서 정신을 차리고 겨우 대답했다. 

"아, 그건 아니에요."

이후 이런 저런 얘길 더 하셨는데 기억이 안 난다. 머리가 하얘졌다. 전화를 끊고 울음이 터져 화장실에 달려가 한참을 펑펑 울었다. 긴 시간 노력하여 끝내 얻어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직 대학생인 데다 겨우 2년째 도전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감당치 못할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나는 아직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알고 보니 그분은 내가 냈던 서울의 모 일간지 신춘문예에서 심사를 하셨단다. 내 원고를 보고는 예심에서 탈락 시켰다고. 그래서 영 맘이 좋지 않았던 차에 내가 다른 데서 당선됐다는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셨다. 학과 교수님들도 한 마음으로 축하해 주셨다. 어떤 분은 본인도 C일보 출신이라며 반가워하셨다. 그 후로도 참 많은 축하를 받았다. 황송할 정도였다. 


나중에 일 년 전 D일보에서 최종심 심사를 보셨던 분과 온라인 상에서 메시지를 주고 받게 되었다. 그분은 새 작품이 아닌 고친 원고로 재 투고하는 것을 약간 우려하시면서도, 이번 작품을 읽어보니 그때의 단점이 잘 보완되어서 등단작으로 손색이 없다고 평가해 주셨다. 나 역시 살짝 찜찜했던 부분이었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했다. 



어쩌다 보니 스물 여섯 이른 나이에 등단을 했으나 나는 좀 더 넓게 보기로 다짐했다. 어느 선생님이 그러셨다. 습작 원고가 무릎까지 쌓여야 등단할 준비가 된 거라고. 나는 무릎은커녕 발목까지 오지도 않았으니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잠깐 활동하다 소리 없이 묻혀도 상관없었다. 언제든 좋은 작품을 쓰면 되는 거다. 

어릴 때에는 그럴 듯 하게 글을 잘 꾸미고 싶었다. 글로 칭찬 받기를 더 좋아했다. 그러면 나비처럼 날아서 당시의 첨예했던 현실에서 벗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훗날 진실함이 없는 글에는 아무 힘이 없다는 걸 알고 난 뒤에야 동화와 만났다. 굽이 굽은 시간이 지나 당선 소식을 들었고, 나는 나비가 된 게 아니라 비로소 고치를 짓기 시작했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정말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예감했다. 이런 마음을 담아 몇 번을 고쳐서 수상소감을 보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좀 흥분이 되었는데 생각할수록 어깨가 무거워졌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  




이게 벌써 6년 전의 일이다. 글을 써서 돈을 벌게 되었으니 더는 작가라는 호칭에 낯간지러워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이제 고치에서 벗어난 건지, 젖은 날개를 말리는 시간인 건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애초에 나비로 태어난 종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평생을 기어다니며 흙의 냄새를 맡고, 불운을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는 운명이어도 좋다. 다만 그 자리에서 담담히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역시 잘 모르겠다. 

어쨌든 등단은 나에게 명확한 해답을 하나 주었다. 

이 길이 맞다. 

당장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해도, 번쩍거리는 결과가 없어도 이 길을 걷는 게 맞다. 

한없이 헷갈리고 흔들리는 시절이 올 때 이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되어 주는 것이다. 과분한 선물의 용도가 고작 이것 뿐이냐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일종의 동기부여를 받은 셈이다. 나는 평생 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겨울은 항상 멈춘 풍경으로 떠오른다. 만물이 잠시 움츠린 계절. 나무는 자랑스런 잎과 과실을 다 내어주고 죽은 것처럼 서서 바람을 맞는다. 하지만 모두 멈춘 건 아니다. 오히려 겨울은 그 어느 시절보다 생명력이 폭발하는 시기라고 들었다. 한 차례 순환을 마치고 다음 생을 준비하는 시기. 봄은 촌스러운 소망이 아니라 굳건한 약속이고, 자연은 봄을 믿고 부지런히 생명을 품는다. 겨울 나무는 시린 눈을 뒤집어 쓰고서도 남몰래 잎눈 키우는 재미로 살고 있던 것이다. 


올 겨울도 충만하게 살아있는 계절이 되기를. 

이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눈이 기어이 움트게 되기를.  

새 봄을 꿈꾸는 모든 이를 응원하고 싶다. 물론 나도 포함해서.  











내가 어떻게 동화를 쓰게 되었는지 예전 글에서 밝힌 바 있다. 


https://brunch.co.kr/@bo0/11


나중에 대학 동기들이 나에 대해 '입학할 때 문 닫고 들어왔으나 가장 먼저 문 열고 나간 애'라고 설명했다. 어쩌다 보니 그것도 그렇게 됐다. 꽤 재미있는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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