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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Nov 21. 2017

엄마는 나의 세계였다

               




나는 엄마와의 애착이 별로 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는 세심하거나 야무진 성격은 아니었고 자식들의 필요에도 다소 무심했다. 사실 엄마는 세상에 둘도 없을 선하고 순수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양육을 착실하게 하는 편은 못 되었다. 초등학생이 되어 친구네 집에 놀러 다니기 시작했을 때에야 우리 엄마가 다른 집 엄마와는 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친구들의 엄마는 자녀가 숙제한 것을 살펴주고 외출 전 아이 얼굴에 선크림을 발라주었다. 무엇보다 자녀가 요청한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얘기해주는 모습에 가장 놀랐다. 우리집에서는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엄마는 나와 언니들을 도와주려 하거나 관리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아빠가 더 섬세한 편이었다.



엄마는 내 시험 성적에 큰 관심이 없었고, 어떤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잘 몰랐으며, 심지어 나의 대학 전공도 대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구체적으로 물었다. 학창시절, 내가 학급반장이나 학생회를 맡을 때면 엄마는 돈이 많이 든다며 앞으로는 그런 걸 하지 말라고 했다. 또 먼저 요구하기 전까지는 딸에게 뭐가 필요한지 잘 몰랐다. 어찌 보면 참 유별난 엄마였다.



엄마는 자기 속으로 들어가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설거지를 하다가, 방에 가만히 있다가, 멍하니 딴생각에 잠긴 엄마를 자주 보았다. 엄마는 홀로 중얼거리기도 하고 이따금 앉아서 눈물을 보이며 기도를 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결국 가난 때문이었다. 별별 문제의 원인은 대개 아빠 쪽에 있었다. 생계 문제를 날카롭게 직면한 사람은 그 밖의 일에 관심을 갖거나 다른 말에 귀 기울이기 어려운 법이다. 엄마는 자주 근심에 휩싸였다. 가정 형편이 기울면서 엄마는 대형 마트에 일자리를 얻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집은 늘 비어 있었다. 그러면 나는 혼자 라면을 끓이거나 인디안밥을 우유에 말아먹곤 했다. 엄마는 정육 코너에서 오래 일했는데 퇴근하고 돌아와 끙끙거리며 손목이며 발목을 주물렀다.



엄마는 늘 바쁘고 무심했지만 돌이켜보면 내 삶에 부재하지는 않았다. 엄마가 잔소리를 하거나 소리를 질러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엄마가 미웠던 적도 딱히 없다. 부모의 관심이나 가정 형편처럼 내게 주어진 상황도 대체로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와 엄마가 비슷한 성정이라 그랬을 것이다. 난 엄마처럼 선하고 맑진 못하지만 엄마처럼 무딘 편이고 자기 속에서 오래 골몰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엄마를 이해했다. 엄마가 방에서 혼자 울면 어린 나는 그걸 문틈으로 엿보며 이유도 모른 채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고 우리가 굉장히 친밀했던 건 아니다. 분명히 서로 사랑하지만 애틋할 정도는 못 되었다.



얼마 전 EBS 다큐멘터리 <마더 쇼크>를 책으로 읽었다. 자녀를 양육할 때 자신이 부모에게 받은 영향이 그대로 전해진다고 한다. 학대와 핍박을 받은 딸은 나중에 자녀를 낳아 기를 때 감정적인 어려움을 더 크게 겪는다는 것이다. 분노를 참지 않는 부모에게서 자랐다면 훗날 자기 자녀에게도 분노를 참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나는 어떤 모성을 받았는지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취학 전, 부모의 돌봄이 가장 필요했던 그 시절은 어땠을까?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를 업어주는 엄마, 나를 위해 그림을 그려주던 엄마,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주던 엄마. 생각나는 건 하나같이 밝은 장면이다. 엄마와 언니들과 함께 재미나게 요리하던 것도, 식탁에 앉아 맛있게 밥을 먹던 기억까지. 잘못을 해서 매를 맞은 적도 있지만 체벌 후에 엄마는 꼭 나를 안고 축복해주시며 내가 태어날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질풍노도의 청년기를 보낼 때 이따금 부모님 댁에 찾아가면 엄마와 대화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언제든 편안하게 돌아올 수 있는 따뜻한 품을 항상 마련해두었다. 나는 엄마 앞에서 할 말을 미리 검열할 필요가 없다. 나를 열받게 한 누군가에 대해 비난을 할 때면 엄마는 그걸 다 듣고도 순순히 내 편을 들어주진 않지만, 그럼에도 엄마 앞에서 얘기하는 게 가장 편하다. 놀랍게도 엄마는 자녀들 앞에서 한 번도 아빠에 대해 험담하지 않았다. 이 또한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과거의 엄마는 칭찬과 애정 표현에 서툴렀지만 환갑을 훌쩍 넘긴 지금은 전화할 때마다 큰 소리로 “사랑하는 예쁜 막내딸!”을 외치며 쾌청하게 운을 띄운다.



나도 이제 엄마가 되었다. 초음파 영상 속에서 뻥뻥 발차기를 하던 아이는 딸이라고 했다. 생명을 몸에 품고 있으니 자꾸 엄마가 생각난다. 그럴 수밖에 없나 보다.



엄마와의 애착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철없는 딸의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 가식이나 계산, 꾀도 모르는 맑은 영혼, 진실된 감정과 표정, 타고난 겸손과 선한 마음씨. 엄마는 실로 아름다운 사람이고, 나에겐 엄마와의 나쁜 기억이랄 게 없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이제야 알겠다. 엄마가 나를 착실히 챙겨주거나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해도, 사실 엄마는 언제나 나의 세계였다. 늘 같은 자리에서 넉넉한 품을 준비하여 따뜻한 말과 미소로 맞아주는, 한때의 내 고향이던 사람. 엄마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 아이를 품게 된 지금에야 깨달았다.



명절에 부모님을 만나고 돌아온 날,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문득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를 상상해보았다. 그저 잠시 떠올리기만 했는데도 존재가 다 부서지는 것처럼 흐느끼고 말았다. 언제나 곁에 있었으나 알아주지 못했던 내 오랜 따스함의 세계. 그것이 무너지면 나는 불덩이 같은 파편들을 내내 맞고 서 있어야할 것이다.



이제 나는 양가 부모님의 건강과 장수를 위해 기도한다. 가족의 복을 비는 빤하디 빤한 어른들의 기도가 못마땅한 적이 있었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그건 내 가족만 챙기는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다. 순전한 소망과 바람, 그리고 두려움과 절박함이 맞다. 가정을 이루고 나이를 먹어야 철이 든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스스로 어느 정도 통찰력을 갖춘 어엿한 성인이라고 여겼으나 사실 이렇게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장차 태어날 내 딸이 어떤 아이일지 그려보다가 나는 과연 어떤 딸이었나 생각한다. 요즘은 엄마에게 우리 세 자매의 어린 시절을 자꾸 묻는다. 그러면 엄마는 지금 눈앞에 선하다는 듯 즐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 미소와 소리가 고향처럼 따뜻하다. 어릴 때의 나는 꽤 행복한 소녀였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그리고 아름다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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