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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영 Nov 28. 2017

남자, 아빠가 되다

                





아버지.

꽤 많은 사람들이 애증으로 기억하는 이름. 좋든 싫든 도무지 떼어낼 수 없는 끈적한 영향력 중 하나. 그럼에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아버지가 이해되기도 한다. 나 역시 그 과정 중에 있고.



나는 임신한 여성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될 수는 없으나 한 사람이 아버지가 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어미가 되는 것과는 분명 다르면서도 새로운 감동이 있는 아비의 탄생. 내가 가볼 수 없는 세계라고 생각하니 더 관심이 간다.



아비가 되는 일은 기본적으로 ‘입양’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여성은 자기 몸에서 아기가 자라고 태어나는 걸 경험하기 때문에 이 아이가 내 자식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지만, 남성은 물리적 연결이 없었으니 우선 내 자녀라는 걸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아비가 된다는 것이다. 우연히 이 글을 읽고는 깜짝 놀랐다.




엄밀히 말해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가 낳은 존재가 아니라 그가 아들로 ‘받아들인(adopt)’ 존재다. 그러므로 부자관계는 상징계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것이며, 아들은 그 상징적 질서 안에 오려 붙여진 존재다.

 _김종엽, 창비 주간논평 <화이, 우리 시대의 오이디푸스> 중에서





아, 정말 그렇겠구나. 본글의 논점은 잠시 제쳐두고, 위의 부분이 생경하게 피부에 와 닿았다. 자기 몸에 접붙여 사는 아이를 사랑하는 건 본능에 좀더 가깝다. 하지만 그저 아이의 존재를 인식하기만 한 상태에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건 쉽진 않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부성애는 본능보다는 ‘의지’에 더 가깝지 않을까. 의지로 맺은 사랑. 아비의 사랑은 어미와는 또 다른 면에서 위대해 보인다.



임신은 여성의 몸에 대변혁을 일으킨다. 나는 임신 전까지 몸으로서의 자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곧 ‘내 정신’을 의미했다. 그런데 임신을 하고 나니 집요하게 몸에 집중하게 된다. 몸의 변화, 몸 안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 증거들을 매일 발견한다. 뭔가 동물적인 삶으로 변한 것 같아 처음에는 서글프기도 했지만 이내 육체로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이 또한 내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인정했다. 임신은 나에게 몸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주었다. 여성은 몸의 변화로 임신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남성에게 임신이란 그저 간접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을수 있다. 먼저 아내의 몸에 내 자녀로 추측되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러다 산부인과에서 아기 심장 소리라도 들으면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날 것이다. 그후 태동을 체험하며 증거를 접할수록 의지는 믿음으로 변하며 굳건해진다. 엄마가 되는 것과 출발부터가 다르다.



아빠는 아이의 탄생에 필수적이고 주요한 영향을 주지만 태아와 실제로 연결되진 않는다. 다만 아내의 경험을 공유하며, 임신으로 인한 여러 변화에 적응하도록 돕는 것으로 임신에 동참한다. 입덧을 하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도록 돕고, 몸이 불편하면 거동을 돕고, 함께 병원에서 초음파를 보며 기뻐하고, 태아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러다 시간이 더 지나면 태동하는 아이를 느끼며 새 생명을 자기 삶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빠는 나에게 그리 자애롭거나 따뜻하진 않았다. 말대꾸는커녕 아빠의 몸에 손만 살짝 대도 혼이 났다. 물론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필요한 걸 채워주려 하셨지만 나에겐 아빠에게 지적받고 상처받은 경험이 더 떠오른다. 구체적으로 일일이 말할 수는 없으나 아빠가 우리 아빠가 아니길 바랐던 적도 많았다. 그러다 환갑이 지나고 손주들도 보고 나니 아빠는 조금씩 부드러워지셨다. 이제는 낯간지러운 애정 표현도 곧잘 하시는데 난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된다.



언젠가부터 아빠는 내가 메시지나 전화에 응답하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하셨다. 급한 성미라서 더 그러셨을 것이다. 안 그러시면 좋겠다고 말해보았다. 아빠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넌 평소에 전화 잘 받잖아. 그런 애가 안 받으면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이 되어서.......”


예전에 자녀 납치를 빙자한 보이스피싱 사례를 듣고, 부모님께 먼저 연락을 자주 드리진 못해도 오는 전화는 꼭 받자고 결심한 바 있었다. 다정하게 신경 써드리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걱정은 끼치지 않고 싶었다. 그렇지만 24시간 휴대전화를 끼고 살 수는없으니 이따금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부재중 전화가 몇 통씩 남는다. 그래서 무슨 급한 일이 있나 싶어 얼른 전화 드리면 또 별일은 없다고 하신다.

“그냥, 막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럼 난 갑자기 열불이 난다.

“아이 참, 놀랐잖아요!”



임신 이후 아비가 된 남편을 보면서 아빠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녀와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것 같다.(우리 엄마가 무심한 편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미는 처음부터 아기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욕망까지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의지와 정신으로 자녀를 품은 자들은 어떻게든 아이를 몸으로 느끼고 존재를 경험하길 원한다. 내가 처음으로 태동을 느끼자 남편은 그걸 몹시 부러워했다. 내 몸속의 일이니 난 아기가 움직이는 미끌미끌한 느낌을 즉각적으로 느꼈지만, 아이가 격동적으로 꿈틀거려야 겨우 표피에 전달되기 때문에 남편은 태동을 경험하기까지 좀 더 기다려야 했다. 하루는 그가 불만을 가득 담아 태담 일기를 남겼다.




어느 아빠의 불만





아버지는 나와 연결되길 원한다. 다 내색하진 않아도 내가 멀어질 때 서운해하고, 손이라도 잡아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신다. 전화로 내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으시단다. 남편 역시 아기와 닿길 몹시 원하는 걸 보면서 혹시 이런 게 아비들의 원초적 욕망은 아닐지 생각했다.



임신 기간 동안 남자는 아내를 통해 아기와 연결될 수 있다. 엄마가 먹는 것과 느끼는 것이 아기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기를 위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아내를 먼저 아끼고 돌보는 게 좋다.

남편은 아버지가 된 책임감을 가지고 나를 세심히 살펴주었다. 그 덕에 변덕스럽고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임신 기간에도 나는 남편 얼굴을 볼 때마다 늘 기분이 좋았다. 이 마음이 태아에게도 전해지길 바랐다. 그래서 가끔 남편에게 서운할 때에도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하기도 했다. 아기가 아빠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돕는 나름의 방법이었달까. 임신을 하니 부부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




남편은 연애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온갖 갈등과 감동의 순간에도 늘 나만 울곤 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위해 우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했으나 그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널 사랑하지만 난 여간해선 눈물이 나지 않아.”

그러다 어느 날 식당에서 함께 드라마를 보는데 갑자기 그가 눈물을 주룩주룩 쏟는 것이다. 주인공이 친부모를 찾아 헤매다가 겨우 만나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심지어 그는 이 드라마를 그날 처음 봤다! 맥락을 몰라도 그렇게 감동적일 수 있나? 이게 그 정도야?

나중에 알게 됐다. 그는 ‘가족주의’ 코드가 드러나는 거의 모든 콘텐츠에 격하게 감응하는 사람이었다. 드라마든 예능이든 마찬가지.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보다가 결말 부분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임신 초기. 불안과 걱정이 많았던 시절, 남편이 말했다.

“여보가 자꾸 걱정해서 오늘 아기를 위해 기도했어. 그런데 눈물이 좀 나더라.”

아비가 된 그는 새로운 차원의 ‘가족주의’를 경험하고 있다. 자녀에서 부모의 입장으로 바뀌어도 반응은 여전한 것이 신기하다.



부성애는 그 특성상 임신 때부터 폭발적으로 일어나긴 어려운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알아가며 친해져야 마음을 더 깊이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아도 시간이 더 지나야 어색하지 않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배아일 때보다는 꿈틀거리는 사람의 형태를 갖췄을 때 더 정이 가고, 무사히 태어나 드디어 서로 마주 보게 되면 더욱 뭉클하고, 어느새 아기가 아빠의 얼굴을 알아보고 방긋 웃기라도 한다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남편 역시 처음엔 태담을 어색해 하면서도, 아이에 대한 사랑과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일찌감치 포지셔닝을 했다. 바로 아이를 품은 아내를 부지런히 보살펴주는 일.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아이에게 더 많은 사랑을 표현했다. 친밀해진 것이다. 그가 써온 태담 일기만 봐도 처음보다 어투가 점점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진다. 남편이 내 배에 입을 맞추고 아기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내 마음도 지잉지잉 울린다.




아빠가 된 남자는 늘어난 식구가 먹고살 것까지 책임질 수 있을지 걱정하기 시작한다. 나도 경제 활동을 할 거니까 난 그리 큰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자기 전에 불안한 얼굴로 생각에 잠기곤 했다.

“사실, 좀 두려워. 나중에 아기가 먹고 싶은 것도 못 사다 주는 아빠가 될까 봐.”

아빠라면 마땅히 경제적 능력을 충분히 갖춰야 한다고 맨 처음 가르쳐준 사람은 누굴까? 아이가 생기자 자연스럽게 스스로 부담감을 어깨에 지우는 본능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책임감이 누군가에게는 큰 스트레스와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걸 남편을 보면서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프리랜서 부부. 불안정할 수는 있어도 그래서 더 자유롭다. 어느 한 사람이 모든 짐을 다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에이, 걱정 마. 나도 벌잖아! 앞으로 더 벌어올게!”

떵떵거리며 호언장담하니 그제야 좀 웃는다. 그래, 책임감 있는 남자는 매력적이지. 돈 벌어오는 일이 전부 그의 몫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자기 몫을 찾는 과정을 지켜보니 또 신기하다.



한 사람이 어떤 자격을 부여받고 그에 맞게 성장하는 것,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임신 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거의 대변혁에 가까웠지만, 남편 또한 자기 속도에 맞게 ‘아빠’로 변화하고 있었다. 나로선 가볼 수 없는 미지의 영역. 그래서 더 신비로워 보인다.




아기가 태어나고 드디어 자녀와 맞닿게 되는 순간, 아비는 기뻐할 것이다. 물리적으로 분리된 긴 시간을 인내로 지나온 아비들. 마침내 아이를 품에 안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쁠까. 내가 너의 아빠라고 말하며 애정과 기쁨과 감동, 그리고 거룩한 책임과 의지로 어우러질 그 표정이 벌써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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