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보영 Dec 05. 2017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살아오는 동안 그야말로 현재만 불태우며 살았다. 지나버린 과거에는 등 돌린 채 미래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어릴 때로 되돌아가고 싶냐는 흔한 질문에도 답은 명확했다. 시간과 젊음보다는 성숙이 훨씬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현재를 택했다. 어릴수록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지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삶에 대한 만족감 역시 과거보다 현재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다.


후회나 미련도 그렇다. 이미 가버린 일에 길게 미련을 갖는 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되도록 빨리 정리한 뒤 지나가게 해야 정신 건강에도 좋다. 이미 끝난 선택과 결과에 ‘만약’을 자꾸 생각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현재에 집중하고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는 삶. 내가 항상 추구하던 가치이기도 하다. 현재에 집중하면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해방되고 과거와 깔끔하게 연결될 수 있다. 원망과 후회는 걸러내고 배움과 성장만 남으면 된다.

“언제나 ‘지금’이 중요해.”
그렇게 생각해왔다. 분명히.




결혼을 하고 아무래도 제약이 생기긴 했지만 그럼에도 행복이 더 커서 만족할 수 있었다. 오히려 미혼의 자유를 누릴 만큼 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회나 미련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임신은 좀 달랐다. 이미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변했고, 출산 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제약과 과업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가만히 감사하다가도 아찔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자유와 시간, 자아실현, 그리고 몸에 대한 긴 미련 같은 거다.



임신 이후, 나는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필요한 걱정까지 머리 위에 잔뜩 쌓아두었다. 분명히 지금 이 순간을 누리자는 자세로 살아왔는데, 이제 '현재'는 앞으로 일어날 엄청난 일들을 준비하는 용도만으로 여긴다. 그리고 지금 내 삶에 일어나는 우울한 변화가 미래에 과연 회복될 수 있겠는지 가늠해본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과거에 대한 미련도 마찬가지. 임신을 하고 나니, 과거에는 있었으나 현재에는 잃어버린 것들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당연하게 획득한 자유와 젊음, 그리고 아름다움. 결혼 전, 혹은 임신 전에 당연히 누렸던 것이 얼마나 소중했는가. 새 생명을 얻어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쁘고 감사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임신과 맞바꾼 것들을 자꾸 떠올렸다.






내 자신으로서 사는 일이 가능해질까.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은 독립된 자아로 활력 있게 살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종속되어야 할까. 간혹 시간과 여유가 생긴다 해도 오롯이 나를 위해 쓸 수 있을까. 의무감이라도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면서 언제나 의무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이 모순적인 인간이 온통 의무뿐인 삶을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나만 이런 상황에 놓인 건 아니다. 남편 역시 비슷한 긴장이 있을 것이다. 임신 이후 그도 할 일이 많아졌다. 남편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역시 감당할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우리 둘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몸의 변화다.



이따금 거울을 볼 때마다 놀란다. 십수 년 보아왔던 내가 없고 웬 뚱뚱한 아줌마가 보인다. 임신 이후 체중이 많이 늘었고 피부 트러블도 잦아졌다. 원래부터 얼굴에 먼저 살이 붙는 체질이어서 그런지 얼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안타깝게도 어디를 봐도 예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찍어주면 사진에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대충 예상할 수 있지 않은가. 임신을 하고 몸이 변하니까 사진 찍을 때마다 놀란다. 머릿속에 예상했던 것과는 번번이 다른 모습이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니 사진도 더 찍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대체로 마른 체형으로 살아온 나는 이런 변화가 당혹스럽다. 빼어난 미인이라 자부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옷 사이즈에 신경 쓴 적이 없고 외모에 대해서도 지금껏 크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늘 당연했고, 늘 만족했던 것들을 임신 이후 잃어버리니 전에 없던 미련과 걱정이 싹튼다.

처녀 적 사진을 보면서,
‘이때 참 예뻤는데.’
맘에 쏙 드는 옷을 보면,
‘예전의 나였다면 이 옷을 샀을 텐데.’
거울을 볼 때도,

‘아기 낳기 전의 몸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과거를 그리워하는 건 어리석다 여기던 내가 옛날 사진을 보며 과거의 나를 부러워하고 있더라. 이렇게 날씬했었네, 이 옷이 잘 어울렸네, 지금은 못 입겠지... 이러면서.

항상 불태우듯 현재를 살고 과거는 그 잿가루 정도로 여겨왔으면서 이제는 왜 잃어버린 것들을 세고 있을까. 그러려니 하면서 담담히 받아들이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면서 그렇게 스스로 다스릴 수는 없을까. 자기연민이 발목을 붙든 것만 같았다.




여기서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정신 차리고 이렇게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됐다.




1.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

임신을 하면 체중이 느는 것은 당연하다. 이걸 받아들이고 살이 덜 찐 임신부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겠다. 따져보자면 임신 후 내 체중 증가량은 평균 수준이다. 주수에 맞게 적당한 정도로 불어나고 있다. 급격한 체중 증가로 의사에게 혼난 적은 없으니 체중 증가를 문제 삼지 않아도 될 것이다.



2. 외모 지향적 가치관에 저항한다.

외형이 변했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며 애초부터 그게 전부도 아니었다. 진정하고 참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취향이 있는 삶의 가치, 인생의 굴곡이 주는 아름다움에 더 주목해야겠다. 살 많이 쪘다, 운동 좀 해야겠다고 굳이 한마디 보태는 불친절한 사람들에게 내 소중한 달팽이관을 써주지 않겠다.



3. 내가 손해 보고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자.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건 내가 지금 뭔가 손해 보고 있다고 생각한 까닭일 것이다. 도리어 내가 얻은 걸 생각하고 감사하는 습관을 가져봐야지. 만약 임신으로 경력이 단절될 위기에 놓였다면 가족과 더 의견을 나누며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사실 사회 통념이 바뀔 필요도 있다. 여성을 미래의 주인공을 낳는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고 함께 사회를 지탱할 주체로 여기면 좋겠다.



4. 내가 직접 선택하고 감당하자.

그러니까 태도의 변화랄까. 늘어난 의무와 변화를 타의적으로 마지못해 감당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더 주체적으로 직접 선택하고 변화를 받아들인 뒤 그 지점에서 의미와 즐거움을 찾을 것이다.



5. 생각의 싸움에서 이기자.

인생을 불평뿐인 똥밭으로 만들 것인가 감사 넘치는 꽃밭으로 만들 것인가. 결국 나의 선택일 터. 설령 진창을 걷는다 해도 인생의 큰 그림을 보려고 노력하겠다.




나에게는 산전 우울증이 없을 줄 알았다. 뭐든 잘 받아들이고 낙천적으로 생각할 줄 알았다. 하지만 외형의 변화가 주는 충격이 생각보다 컸다. 침착함을 되찾은 건 의외로 시간 덕분이었다.

임신 중기 때는 그냥 평범하고 배 나온 아줌마처럼 보여서 울적했는데, 후기로 넘어가면서 배가 비현실적으로 커지자 오히려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변한 체형이 익숙해지기도 했고.

향후 도래할 일들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양질의 육아 서적을 보는 것도 좋다. 나는 엄마의 심리를 살피고 돌보는 책들이 개인적으로 도움이 됐다. 임신 출산에 대한 훌륭한 다큐멘터리도 많으니 남편과 함께 시청하면 좋을 것이다.




임신한 아내를 둔 남편이라면 어느 정도는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해두는 걸 권한다. 아내의 말에 즉각적으로 대답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는 것.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아내: 나 살 많이 쪘지?
남편 : 아니! 예쁘기만 한걸!


아내: 우리가 애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남편: 걱정 마. 둘이 힘을 합치면 해낼 수 있어.


아내 : 앞으로 애 키우다 세월 다 보내겠지?

남편 : 육아하면서도 자아실현할 수 있도록 서로 돕자. 어느 정도 키우면 다시 알콩달콩 살 수 있어.



그리고 아내가 현재 호르몬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걸 이해하고, 아내의 짜증과 우울이 나를 향한 공격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내 남편이 말했다).




호르몬 핑계 대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주기적으로 눈물을 좀 뽑아줘야 했는지 가끔은 별거 아닌 일에도 남편 앞에서 엉엉 울곤 했다. 그렇게 위로를 받으면 마음이 좀 나아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임신은 부부가 함께 짊어져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호르몬의 침공에 당황하지 않고, 서로 이해하면서 용납과 배려로 보살핀다면 이 또한 문제 없이 넘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봐도 비현실적이라 찍어보았다.









(Cover Photo by Paul on Unsplash )

이전 05화 남자, 아빠가 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