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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현 Apr 25. 2023

치매

치매

2023.4.21. 토

글 쓰는 것이 주춤 그리고 점점 똑같음. 신선한 충격이 없음. 심각함.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라. 글이 닮아가고 있다.  


은퇴 후 3년 다 못 쉬고 다시 힘을 내서 요양보호사 합격까지가 일단락이다. 그 후 인도하심은 기대가 되나 말하기가 말이 앞서기가 어렵다.

구로동 고용노동부 가서 요양보호사가 되고 싶어 왔다니까 친절히 점심시간인데도 밥보다 우리를 신경 써준다. 초면에 주차 도장까지 미리 챙기며 한 여자 공무원의 자세로선 내가 아는 자세가 아닌 사랑 듬뿍 담긴 꼭 최선 다해 우리 갈 길을 곧게 가도록 돕고픈 사람을 만났다. 혹 천사 아닐까? 정부 지원카드를 발급해 줬다 나라서 요양보호사 되기 위해 공부하는데 학원비 보태준다는 것이다. 그 과정서 아내의 당당함과 애씀이 드러났다. 공무원 앞에서 주눅 들지 아니하며 당당히 모르는 걸 묻는 태도가 좋다. 상대가 주춤한다. 아니 저런 자세가? 당당한데 오히려 내가 위축되네. 난 잘 안 들리고 이걸 혼자 하라고 내깔려 뒀으면 성질만 버리고 고생만 하다 제대로 처리 못하고 왔을 험난한 길을 아내가 앞장서니 거뜬히 통과한다. 제법이란 생각이 들었고 날 위해 앞장선거 같은 느낌이었다. 나 혼자 하라면 못할 것 같으니까 자신을 희생해서까지 같이 가준 거 같으니 도망갈 수도 없이 가야만 했다. 혼자선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화할 때 안 들린다는 것이 그리고 처음 하는 일이란 것이 잘 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은 뻔한 일이다. 내가 요양보호사 한다고 따라나선 것을 아내는 놀라며 높이 평가한다. 아마 죽어도 안 할 거라 생각했나 본데 날 뭘로 보고 그렇게 판단한 걸까? 그렇다! 왜 그 일을 한다고 따라나섰을까? 그냥 백수로 지내는 것이 힘들어서인가? 주께 주권이 있으니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다음날 요양보호사 학원을 찾아 나섰다. 동작구니까 동작에 있는 요양보호사 되려면 어찌하나 두 군데 학원이 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나 물망에 오르고 둘 다 가보고 저기가 더 나아 보이나 여기로 결정한다  교통이 다니기 여기가 좀 낫네. 그리고 등록! 한 달 온라인 강의 한 달 직접 대면 학원 강의. 얼마나 머리가 쥐 나는지. 진정 난 몰랐었네. 그렇다고 점심이나 맛난 거 먹을 수가 있겠는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하는 건데. 그러니 열악한 분식집만 가는데 나야 라면 좋아하니까 됐는데 아내는 라면을 소화를 못 시키니 안쓰럽다. 사당동 뒷골목엔 분식집이 제법 많았다.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하나 거기서 거기다. 집에 가서 먹고 불이 나게 뛰어오자 하는데 그것까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급 집 갈 수도 없고.. 50분 수업에 10분 휴식 간만의 새로운 공부 엉덩이 배기는 의자 스트레스 시간의 얽매임 구속. 그나마 가면 나야 믹스커피 마실 수 있다만 아내는 그것도 몸이 허락지 않아 못 마신다. 내 거 한모금정도 한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 술로 치면 한잔도 못 마시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점심값도 올라 분식집만 가는데도 비싸고 맛없다. 딴사람들은 어찌할까? 일부는 학원서 반장이 맛나게 찌개며 한 상 차려 먹는데 그렇게 맛있단다. 난 학원 들어오면 음식냄새 나서 싫은데 이들은 그게 좋단다. 한두 명은 우리처럼 분식집 아니면 집으로 불티나게 갔다 오고 6-8명이 싼 점심 뷔페 실속 있는 엄마집 같은 밥집을 가고 있었다. 학원 옆사람들 통해 동네 점심 뷔페 7000원을 만나기까지 오래 걸렸다. 7000원 주고 먹어도 맛있으니 됐다. 안정을 찾는다. 다 끝났을 때의 기쁨에 자축 짜장이라도 먹으려다 돈 걱정에 추운 날씨에 그리고 무슨 대단한 거 하는 거라고 창피함에 관둔다. 마지막 관문 시험이 남았다. 시험은 컴퓨터러 보기 보단 문제지 직접 보는 게 귀 나쁘고 컴퓨터 싫은 나로선 당연히 좋아 기다리다 지쳐 컴퓨터로 보기로 결정하기까지 그리고 시험공부하기까지 두어 달이 흐른다. 시험날 공용주차장 만차로 견인하거나 딱지 띠던가 그냥 시험장 근처 길에 세워놓고 시험시간 쫓겨 들어갔는데 아내는 3층으로 나는 2층으로. 헤어진다. 자꾸 주차한 게 범칙금 물을까 봐 머리 뒤통수가 켕기면서 안 들리는 설명을 옆에 앉은 아줌마 덕분에  들으며 시험에 임하고 헷갈리는 문제에 합격 장담 못하는데 시험 끝난 후 나와 아내와 맞춰 보다가 통박으로 썼다가 그나마 막판에 고친 게 그냥 놔두면 맞는데 괜히 고친 게 나오고 대여섯 개 애매한 거 중 4개가 벌써 틀리니 시험 후에 모든 스트레스는 떠나갔지만 찝찝하다. 그래도 끝난 자유함은 해방의 기쁨을 맛보듯 좋았다. 떨어지면 다시 시험 안친다 시험 보는데 32000원 든다. 치매 어르신의 얘기를 신우회 후기 쓰듯 쓰고 싶었고 그리하면 신선할 것 같았기에 주님이 그 길을 내게 여시는 게 아닌가 생각 들며 그렇다면 붙여주시겠지 할 뿐. 다음날 합격에 아내랑 집에서 짜장 시켜 먹는다 정말 기분이 순수하게 모처럼 좋다. 미국 딸은 축하한다고 짜장 먹는 거 인증샷 남기란다. 짜장이 먹고 싶은가 보구나. 가면 사주마. 짜장 거의 다 먹다가 생각나 찍어 보냈더니 짜장보다 기뻐 먹는 모습이 보고 싶은데 짜장만 찍혔단다. 부녀지간 속 마음이 다르다. 한 가지 별것도 아닌 것 같은 거에 묶여 있다가 해방되니 피부병 간지러움이 나은 것 같고 잠이 쏟아졌다. 이렇게 묶여 있었구나 사서 고생 엄청 했구나. 그러고 나서 어찌 살 것인지가 새로 다가온다. 100세 시대다. 70이지만 뭘 배우고 도전해 보자. 체력 딸리면 거기까지 하고 다른 일 생기면 거기까지 하고 그래도 남는 세월 사둔 어르신이 그림을 배워보라 추천하니 3개월 미국 가서 배워오자 그리고 그리자. 안되면 어때? 시골 가서 그리면 좋겠네 그렇구나 가자. 사둔 어른만 그랬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한데 친구를 만났는데 얘도 나보고 그림 배우라니 주님의 뜻으로 또 격상시켜 배우려 한다.

주님의 뜻이라면 미국에 보내주시던가 그림 가르쳐줄 사람을 만나게 하시겠지.



치매는 울 엄마 써볼까?

치매 전까지 보통의 이북사람처럼 사셨다. 6.25 전쟁! 이북서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와서 장사하여 돈 벌어 스웨터공장을 차리고 애는 칠 남매를 낳았다. 19살부터 2년에 한 명씩 나으면 34살에 자식이 칠 남매. 그때면 1960년대. 요즘은 34살에 장가나 시집갈 나이가 되는 정도에 이미 애 7에 그러니 세상을 알지도 못하고 커 가면서 스스로 변하는 삶이 신비스럽다. 열심히 일해 돈 벌어 자식들 공부시켜 일류에 넣고 집도 이 층집 짓고 자가용도 외제차 몰며 100명 일하는 스웨터공장도 짓고 교회도 나가며 목사님 전도사님 섬기며 동네 부잣집이 되었다. 뿌듯했다. 과자도 구멍가게 가서 먹기만 하면 월말에 가게 아저씨가 수금하러 공장 사무실로 온다. 다들 주위서 부러워했다. 그리고 커서 결혼을 칠 남매가 다했다 요즘은 결혼도 잘 안 한다. 연애를  배워준 사람도 없는데 모두 연애결혼이다. 큰누나는 다니던 대학 교수부인도 되고 난 짜장에 중독되어 음식점도 하고 동생은 스웨터공장서 일도 잘하고 모두 애들 낫고 열심히 살았다. 칠 남매 중 여자 넷은 가서 아들을 낳았고 남자형제 셋은 의리 있게 여자들만 나았다. 막냇동생이 둘둘씩 여자를 나아서 나도 의리를 지켰으니 아들 난다며 샛째애를 나았으나 딸이었다.  1990년대 어느 날 아버님이 쓰러지셨다. 뇌출혈 반신불수. 그리고 7년을 더 사셨다. 칠 남매가 당연히 애썼다. 요즘은 자녀들에게 신세 안 지고 부부가 둘이 사는 게 당연하다만 그땐 자식이 모시는 게 당연했으니 세월이 안 가는 것같이 가고 안변 하는 것 같지만 엄청 변해있어 결국 우리 부모들은 왜 저러실까 자식 때는 안쓰러워했지만 나는 지금 더 시대를 못 쫓아가는 듯하다. 정신이 멀쩡하셔서 같이 테니스 치시던 분들이 가끔 보고 싶어 찾아오면 못 견뎌하셨다. 다들 아직도 공도치고 술도 마시며 농담도 하고 잘 사는 게 자기는 한쪽 팔다리 못쓰고 입가에 침이 새니 옛정을 생각해서 오는 사람들 꼴도 보기 싫으셨을 것이다. 어머님이 다이마루에 새도 키우다 모든 걸 넘기고 아버지와 양수리 공기 좋은 곳에서 전원주택 생활로 전환하신다 가끔 자식들이 양수리로 놀러 가서 술 마시다 온다. 거기서 어느 날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날 여동생이 이사 가는 날이라서 형제 들은 정릉에 있었다. 매형 두 분께서 양수리에 먼저 와 계셨고 우린 어찌 연락이 됐는지 밤늦게 양수리로 서둘러 갔다. 그리고 서울의 아산병원에서 장례를 치렀다. 가족 중 죽음이 처음이라 많은 사람이 오고 많은 도움들이 있어 축제분위기에서 기분 좋게 사흘을 보냈다.

내가 장남이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자연스레 어머님과 함께 살게 된다.

어머님이 여장부였고 아직도 건강하셔서 허브 재배에 누나일 도움도 주시다가 우리랑 살 수밖에 없는데 뭐가 걸리셨을까? 못 오시고 맴도셨다. 우리도 오셔야 편한데 그러니 안타까웠다. 이모님 댁으로 가셨다. 그리고 살림을 배우신다. 콩나물국 끓이려면 콩나물 다듬어야 한다 자로 4cm에 맞춰 자르면서 살림을 배우신다 그동안은 여장부로 남자처럼 돈만 버셨는데 이젠 60이 다 되셨으니 손주들이나 보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색하지만 대세를 그르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드디어 우리 집으로 이모집 몇 달 후 전격적으로 오셨다. 애들 손주들 보며 꼼꼼히 살림을 잘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망한 삶에 개입하시고 고생 속에 함께 하시며 은혜를 주시더니만 산나물집을 근사하게 하게 된다. 그전에 남대문서 액세서리 도매도 십 년 했으나 술만 먹고 돈도 못 벌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예수를 믿게 되고 그 후는 주님의 인도함으로 사는데 그래서 행복했는데 어머님이 치매가 온다. 치매가 뭔지 우리 때 잘 몰랐었기에 생고생을 한다. 어느 날이었다. 교대역에서 신길동을 가려면 전철에 버스로 바꿔 타고 전철도 갈아타고 해야 하는데 나도 헷갈리는 이모네를 잘 찾아다니셨건만 교대역서 집에 오는데 집을 못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본인도 답답하셨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러지? 지금 그 나이인 우리는 건강식품을 먹으며 예비하기에 오래는 사는데 결국 늦게 치매가 더 많이 온다만. 요즘 손주 유치원 픽업할 때 나야 아무 생각 없이 가지만 가보면 젊은 애엄마들이 주로 오면 손주가 나도 그랬던 것처럼 왜 나만 얼굴에 검버섯 있는 키 작은할아버지야 하는 불만이 있지 않을까? 왜 우리 엄마는 화장도 안 하고 옷도 막 입고 도시락 주러 학교 온 거야? 같이 살게 된 후에도 나땐 왜 엄마는 방에만 계시지? 같이 나와 티브이도 보면 좋을 텐데 그러나 막상 나오면 드라마를 안 보고 보는 게 다르고 대화도 달라 왜 저러시지만 할 뿐 외로움을 적적함을 아우릴줄 몰랐다. 나도 지금 그러고 있는 것 같다 더할 것이다. 그때 치매가 뭔지 몰라 젊은 의사가 늦게 병원에 모셔 왔다며 뭐라 했다. 내가 알았냐고요? 치매가 뭔지를. 일단 기억력이 없고 다 까먹는다. 요양원을 처음 들어가실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난 병원 가듯 그런 건가 보다 하고 모셔갔지만 어찌 보면 슬픈 대목이어야 하는데 그렇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집보다 나을 것 같았다. 죄송하다.

요양원을 전전했다. 한번 폐렴 와서 큰 병원 갔다 다시 가려면 안 받는다. 돈도 많이 들었지만 형제가 많아 그중 나눠 내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못 내기도 한 형제도 있었고.. 그나마 장애 등급 따고 나라서 어느 정도 지원해 줘서 돈문제는 해결됐다만 같이 사는 것은 힘들었다. 그런 시대가 또 아니었다. 큰 누나만 해도 집에서 같이 모셨나 보다. 난 요양원이 엄마에게도 백번 나은 듯했다. 만일 내가 보기에 나나 아내 중 누구 하나가 엄마를 모시는 게 맞다 판단했더라면 당연히 그리 했을지 모른다만 그런 생각이 안 들고 일해야 되는데 왜 엄마가 저러시지 하며 투덜거렸으니.. 그렇게 요양원 생활이 시작된다. 이모님이 엄마를 버린다고 병원에 가둔다고 생각해서 분노한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다. 자기 집으로 보내라 하시며 분노의 섭섭함의 감정이 용기를 내게 하며 동생 데리고 산다고 했으나 과연 될까 안될 텐데 어른이니까 따를 뿐이었다.  보름인가 몇 달 만에 안 되겠다고 병원으로 모시라 해서 화끈한 결정에  그게 맞다 뒤늦은 결정이지만 다행이네 생각했다.  화도 급히 내시나 포기도 급하시다. 그런 일 없었다면 아마 두고두고 욕먹을뻔함. 그분들도 다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전전한다. 점점 상태가 나빠지셨으나 집보다 지내기는 나았다고 본다. 거기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모셔야 했을까? 일 때려치우고? 좌우간 지금은 대부분 요양원으로 모시기에 죄 진 생각은 안 든다만. 나 치매 오면 집에서 모셔라 하진 않을 것이기에..

이모님이 동생을 병원에 가두지 못한다며 맨발로 말리셨을 때  아니 오늘 들어가셔야 해요 이번기회 놓치면 안돼요! 단호하지 못한 것은 이모님의 진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모부님도 얘들이 엄마를 병원에 가두려 하는구나 했으니까. 그래서 동생네가 애써준 동부시립병원 자리를 놓치고 만다. 다행히 몇 달 후 들어갔다. 너무 좋았다. 시설도 좋고 넓고 깨끗하구나. 친절하다. 그래서 마음이 편했다. 모든 게 감사했는데 죽을 때까지 한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나? 강남엔 비싸고 좁고 운영자들도 초보인듯한데 거기 갔다가 안 되겠다 해서 금방 나오고 하다 가게 근처 수녀님들이 운영하신다 해서 느낌이 왠지 좋아 갔더니 그런대로 좋았다 거기면 됐다. 그림도 그리고 뭐 하는 게 많구나 서로 잘 모여 잘 지내는구나. 작품전도 하고 보호자 초청해서 소리도 듣고 반영한다. 그러나 폐렴 후에 다시 들어가는 게 어렵다 아쉽다 그때 운명처럼 용인의 한 원장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이 도우셨기에 멀고 시설이 세련되지 못했지만 그리로 모셨다. 분당서 얼마 안 떨어졌고 복잡하지 않았다. 누나가 엄마를 이제는 멀리 보내는구나 섭섭하게 생각하는 듯했으나 나중에 적응되니 면회를 이전보다 더 자주 왔다. 누나들이 격려해주지 못해 걸렸지만  세월 가니 나 또한 적응됐다.

어쩌면 그곳은 어머님의 마지막 머무는 곳으로 예비된 곳이었는지 모른다. 결국 거기서 주님 주신 사명을 마치고 죽기까지 하셨으니까.

아내의 절친의 어린 시절 친구가 성남의 어느 골목서 액세서리를 리어카에서 팔기도 하고 국수도 팔다 그다음 소식이 끊겼었는데 고생하다 거기 요양보호사로 가게 된다. 가서 보니 원장선생이 수간호사 출신인데 자기는 요양원이란 직업이 없었으면 뭘 할 수 있을까 하며 어르신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자세가 돼있다며 우리 엄마 갈곳 몰라 헤매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이리로 오라 그랬을 때 가보니 원장님이 통통하고 잘 웃고 신뢰가 같고 그렇게 그 친구를 거기 예비하신 것도 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느껴졌다. 예상대로 여기선 폐렴이 와도 인근 병원서 치료 후 다시 받아주며 울 엄마를 최고 착한 치매상을 줄 정도였다. 점점 말도 어눌해지고 글도 못 읽게 되고 사람도 못 알아보게 됐다 처음엔 맛난 거 버리 바리 해 가지고 가서 요양원 나와 근처 그늘에서 소풍 온 것처럼 먹기도 하고 식당도 여기저기 처음엔 내가 좋아하는 짜장면에서부터 차 타고 밖을 보며 중얼거리는 게 스트레스가 풀릴듯하여 강남으로 차 타고 가기도 했지만 점점 쇠약해지셨다. 날 남편인 줄 알 때도 있었고 팔이 부러져도 아프건만 알지 부러진 것도 모르고 눈이 안 보여 간단히 수술하면 되나 움직이지 마라는 소리를 못 알아들으니 수술 못해 눈이 안 보이고 이빨도 당뇨로 인해 거의 다 빠지고 당뇨 수치는 숫자에 불과했을 뿐 높다고 당황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오늘까지 이길 바랬다만 생명은 모질었다. 폐렴도 반복되니 거의 끝자락인 듯 느껴졌다. 슬프지도 않았다. 저리 사실 바엔 차라리였다. 어느 날은  찬송도 하고 예수님을 다시 영접도 시켜보나 과연 알아들으시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내 눈에도 내 생각에도 이제 사는 게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치매라도 삶의 이유가 있었다. 우리 칠 남매가 몇십 년간 뿔뿔이 흩어진 후 모두 모인 적이 없었는데 어머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로 인해 다들 돌아왔다. 그래서 칠 남매를 기적처럼 모이는 역할을 하시고서야 눈을 감으셨다. 화장뒤 나온 아주 작은 양의 뼛가루를 보며 천하를 다스렸던 분의 뼈가 이리 작은 가에 놀랐다. 치매도 목적 있는 삶인데 하물며 우리랴. 모두에게 각자 사명이 있음을 깨닫게 하신 우리 어머니셨다. 비록 커피를 열 잔이고 스무 잔이고 한잔도 안 마셨다던 기억력에서부터 죄 없는 신문을 무엇땜 찢으시고 먹는 것도 왜 먹는지 먹다가 도중에 잊어버리셨지만 생명의 가치를 알게 해 주신 어머니셨다. 그 치매를 만날 수 있는 요양보호사란 길을 내게 여신 깊은 뜻을 좇아서 글을 쎠볼수 있으면 말년에 보람이 있을 것이기에 소망이 생기며 오늘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나아간다.

70이지만 소망 있는 삶은 주님과 함께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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