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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예술이 되는 빛

브뤼셀

by 김보아
"재료는 빛이고, 빛은 재료이다." - 루이스 칸


나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열리는 디자인 페어를 보기 위해 조금은 급작스럽게 이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별다른 준비 없이 무작정 도시에 도착하고 나서야 벨기에의 공식언어가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독일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브뤼셀 시민들은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브뤼셀 거리를 걸어가며 느낀 도시의 정취가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부드러움과 우아함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브뤼셀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유럽 특유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한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의 다양한 양식이 섞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이유는 벨기에가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면서 오랜 시간 이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벨기에의 디자인 양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계기는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화와 대량생산으로 제품은 획일화되고 질은 떨어졌다. 벨기에의 아르누보(Art Nouveau)는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무미건조해진 일상의 삶에 새로운 예술이라는 의미의 아르누보(Art Nouveau)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아르누보 예술가들은 그동안 모방해 왔던 고전, 고딕, 르네상스의 사조를 거부하고 자연의 형태를 모티브로 삼아 그것의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형태를 실제 삶의 공간 속에 구현하였다.


브뤼셀의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상업지구의 거리 곳곳을 천장으로 마감한 것을 볼 수 있었다 ©boah


아르누보 양식이 잘 구현된 어느 카페 ©boah


천창 Sky Light

벨기에의 대표적 건축가 중에 하나인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는 철과 유리를 사용하여 넓은 개구부를 만들어 빛이 내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설계하였다. 천창의 활용은 밀집되어 있는 브뤼셀의 도심주택에 부족한 자연광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오르타가 주로 사용한 디자인 언어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오르타 박물관 Horta Museum에 들어서면 그들이 왜 자연의 형상을 그토록 갈망했는지 알 수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마감된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은 계단과 복도를 통해 부서져 실내공간을 더욱 개방적이고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천창은 일조에 따른 직사광의 유입을 고려한 것으로 장식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빛을 부드럽게 여과시키는 역할을 한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공간에 닿는 빛은 벽의 마감재와 어우러져 다양한 색감의 변주를 만들었는데 한 번 부드러워진 빛은 벽과 만나 난반사를 일으키면서 공간을 더욱 포근하게 하였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그림자의 변화는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느끼는 공간감에 변화를 주는 요소가 되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나는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유심히 관찰하였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간 속에는 나뭇잎, 꽃, 곤충, 파도, 바람 등의 자연에서 비롯된 유기적인 곡선이 쉼 없이 흘러갔다. 천창의 부드러운 곡선부터 계단, 기둥, 가구, 조명 심지어 문에 뚫려 있는 아주 작은 열쇠 구멍까지 그 섬세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그 작은 디테일들에 담겨 있는 디자이너의 관심과 표현이 얼마나 공간을 풍부하게 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다채로운 감정을 만들어내는지 보았다.


철과 유리라는 산업화 시대의 신소재는 다양한 형태의 적용, 특히 자연의 형태와 색의 구현을 가능하게 하였고 빛의 반사와 투과를 극대화한 공간을 가능하게 했다.


Horta meseum은 사진촬영을 허락하지 않아 현장에서 구입한 엽서로 기억을 되살려 볼 수 있었다. 사진에는 다 담을 수 없는 감정들이 떠오른다




재료는 빛이고 빛은 재료다


Hortar Museum에서 15분 정도 걸어가면 메종 아농 Maison Hannon을 만날 수 있다. 1902년 에두아르와 마리 아농(Edouard and Marie Hannon) 부부가 건축가 쥘 브룬 포(Jules Brunfut)에게 의뢰하여 지어진 메종 아농은 벨기에 아르누보와 프랑스의 아르누보를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세계관으로 결합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거리로 흘러내릴 것처럼 확장되어 보였던 테라스가 온실의 개념으로 창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둥근 금속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는 천창과 유기적인 곡선으로 이루어진 색유리의 창, 원형 패턴의 모자이크 타일로 마감된 바닥은 빛과 재료의 질감이 섬세하게 서로 조화를 이루었다. 유리 위로 흐르는 오후의 빛은 손끝으로 만질 수 있는 재료였다. 오르타와 아농이 남긴 공간의 언어는, 결국 빛이 아니라 ‘빛을 다루는 손의 기억’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집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홀 중앙의 원형의 계단과 벽면 가득히 그려져 있는 프레스코 벽화이다. 이 벽화는 주로 석회 플라스터(lime plaster) 위에 천연 색소를 이용하여 프레스코 (fresco)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벽화에 사용된 금박 장식, 유약 처리된 표면, 부드러운 파스텔톤은 테라스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자연광의 흐름에 편안하게 어우러졌다. 석회 플라스터는 표면이 미세한 다공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자연의 빛이 벽화에 닿으면 빛을 선택적으로 흡수하고 반사하면서 시선의 움직임을 따라서 미묘하게 변화되었다. 때로는 깊게 때로는 은은하게 변화되는 벽화는 자연광이 만들어 내는 풍부한 변화에 따르는 색채의 변주를 만들어 내었다. 빛은 재료와 별개의 요소가 아니라 서로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공간 속에서 보여주었다.


Maison Hannon 의 실내외부 모습,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boah



브뤼셀 중심가를 걸어보면 이 도시가 유럽의 역사적 중심지 중 하나로,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문화와 예술이 교류해 온 도시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이 도시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 아르누보가 말하는 새로운 예술의 의미가 녹아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가 흡수된 우리의 일상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이고, 그것이 우리의 감성을 얼마나 풍부하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단순히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자연의 이치를 우리의 삶 속을 자꾸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 시도가 아닐까. 자연의 재료가 빛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찾은 아르누보의 아름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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