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에서
"...... 큰 빛을 보아버린 두 눈은
그 빛에 멀어서 더듬거려야 하고
너무 맑게만 살아온 삶은
흐린 날 속을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 나희덕
오전 내내 비가 내려 하늘이 회색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어느 날, 나는 우비에 장화를 신고 어두운 하늘이 성 머리까지 내려와 있는 스포르체스코 성 Castello Sforzesco으로 갔다. 회색의 하늘은 마치 어린아이가 빼곡하게 칠한 크레파스 그림처럼 균일한 빛을 띠고 있었다. 트램을 타고 브레라 Brera지역을 지나 저 멀리 보이는 성을 향해 걷는 동안 빛이 주는 자극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제만 해도 활기가 넘치고 들떠 보였던 이 거리의 풍경은 하루 사이에 차분하고 고요하기까지 하였다.
필터가 된 하늘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거운 공기층은 어제 보았던 태양을 숨기고 푸른 하늘마저 가려 버렸다. 흐린 날의 공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작은 물방울들이 대기 중에 가득 차 있어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빛의 진행을 방해한다. 빛은 공기 중에 있는 물방울과 먼지 같은 입자에 부딪혀 곧바로 공기층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난반사를 반복한다. 그렇게 대기 중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광선의 힘은 약화된다.
물방울과 대기의 입자들은 일종의 필터 역할을 하여 강한 태양빛을 걸러 낸다. 숨겨진 거대한 광원은 하루 종일 균일한 천공광을 제공한다. 이는 예민한 색의 조율이나 질감과 명암의 미묘한 차이가 필요한 작업을 하기에 적합한 빛 환경을 만들어낸다. 천공광은 하루 동안 변화하는 빛의 폭이 적고 자외선이 적어 캔버스나 피사체의 변색을 막는다. 맑은 날에도 북향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이러한 특성을 지니는데 시각적 스트레스가 적어 작업자의 몰입도를 높여 주고 장시간의 섬세한 작업을 가능하게 한다.
북유럽 화가들이 흐린 날씨를 선호했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베르메르가 그토록 사랑했던 북쪽 창가의 빛, 그 부드럽고 균일한 광선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평면이 된 세상
성문 앞에 다다르자 광장 위를 지나는 전선에 새들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빛이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한결같고 약한 빛은 이 풍경을 마치 깊이를 잃어버린 평면처럼 만들고 있었다. 흐린 날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지 못해 마치 2차원의 세상처럼 단선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입체감은 사물에 생동감을 주지만 입체감이 약해진 장면들은 생기를 떨어뜨려 정지된 화면처럼 느릿해 보였다. 흐릿한 빛은 사물의 경계를 무디게 만들어 부드러운 풍광을 만들어 내었다. 돌바닥을 걸어 다니는 비둘기들 아래에도, 삼삼오오 서 있는 사람들에게도 빛의 흔적인 그림자는 흐릿했다. 빛의 대비가 사라진 공간에서 그림자는 옅어지고 윤곽과 경계가 사라져 공간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메를로-퐁티가 말했듯 우리는 빛을 보지 않고 빛을 통해 사물을 본다. 그런데 흐린 날, 빛이 자신을 숨기자 세상도 함께 가라앉았다. 빛의 변화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의 최종적인 모습을 결정한다. 우리는 빛이 변화하였다는 것을 바로 알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의 미묘한 변화까지 감지하지 못하기도 한다.
빛은 정서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배경과 주고받는 모든 교류에 관여한다. 흐린 날의 빛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물의 색상과 질감도 왜곡하지 않는다.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정제하여 고요함에 이르게 한다.
걸러진 빛과 시간
이러한 빛 속에 오래 있으면 기분이 가라앉기도 한다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시각적 안정감이 주는 사색의 시간이 소중했다. 스포르체스코 성의 붉은 벽돌도, 광장을 오가는 모든 움직임들도 회색필터를 통과한 듯 가라앉아 있다.
문득 밀라노라는 도시가 보여주는 또 다른 얼굴, 디자인의 화려함이 쏟아내는 정보에 떠밀려 온 시간이 스쳐갔다. 빛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 어느 날 오히려 빛은 대기 중에 숨어서 때로는 드러날 필요가 없음을, 강렬할 필요도 없음을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물방울들이 만들어낸 흐린 날의 풍광이 오랜만에 나에게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이 도시에 머물러 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