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수도원
“진정한 어둠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빛을 이해할 수 없다” –유하니 팔라스마(Juhani Palssasmaa)
빛의 과잉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어두움은 더 이상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휴대가 가능해진 빛은 우리가 머무는 공간이 어디든 간편하게 어두움을 사라지게 한다. 우리는 하루 종일 필요 이상으로 빛에 노출되어 있고 잠들기 직전까지도 핸드폰 불빛을 쬐다가 잠이 든다. 우리는 어두움이 낯설고 두렵다. 어쩌다 가로등이 없는 시골길을 밤에 운전하게 되면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의 실루엣만 봐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는 시칠리아 동쪽 팔레르모 지역을 여행하기 위해 숙소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산속 꼭대기에 위치한 호텔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은 예전에 수도원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수도원이라…… 나는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떠올랐다. 빛과 어두움, 그 두 가지 세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책이었다. 나는 옛 수도원 건물에 머물러 보기로 하였다.
산타 마리아 델 보스코 호텔은 시칠리아의 벨리체(Belice) 계곡의 깊은 숲 속에 자리한 것으로 예전에는 수도원으로 사용된 건물이었다. 원래 이단 혐의를 받고 쫓겨난 은둔자들에 의해 세워진 이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점차 베네딕토회 규율을 받아들였고 이후에는 올리베타나 수도회로 이어지며 점점 확장되었다. 건축가 안토니오 무토네(Antonio Muttone)와 조각가 프라 파올로 부사카(Fra Paolo Busacca della Ficarra) 등 뛰어난 예술가들도 참여해 르네상스적 특성과 바로크적 화려함이 조화를 이루어 내었다.
체크인을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108미터 길이의 크고 웅장한 복도 좌우에 방이 줄지어 있고 중간중간에 예전 수도원으로 쓰일 때 예배당에 놓였던 의자들과 소품을 두어 그 시대의 흔적을 남겨 두었다. 벽에는 몇 개의 벽부등이 있었고 층고가 높은 벽의 끝에는 작은 고창들을 통해 외부의 빛이 안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낮 시간이었지만 내부 공간은 충분히 어두웠다. 수도원의 옛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것은 빛이었다. 아니 어두움이었다.
해안에서 떨어져 있고 관광지로부터 접근성이 떨어져서 인지 숙박객들은 서너 팀 정도였다. 아침 식사 때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 인원수에 맞게 방 별로 식기세트가 세팅되어 있어 지내면서 숙박객들이 서로의 얼굴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리셉션에서 소통하는 호텔 주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탈리아어만 가능한 시칠리아 원주민들이었다. 호텔 주인은 가업으로 물려받은 이곳을 좀 더 대중화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수도원 건물의 특성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한적하고 고요한 이 공간은 한 여름의 시칠리아 태양이 이곳만 비껴갔을까 생각할 정도로 공기가 서늘하다 못해 추웠다.
저녁이 되어 외부로부터의 유입되는 자연광이 옅어 지자 수도원은 어두움 속에 더욱 고요해졌다. 보이는 것은 어두움뿐이었다. 어두움과 고요는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었다. 어두움을 응시하면 아주 가느다란 빛이 보이고 그 빛 주변으로 천천히 사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한 빛 아래서 놓쳤던 작고 사소한 형상들, 희미한 소리들이 보이고 들렸다.
어두움은 우리의 미세한 감각을 깨워 주변의 사물과 현상들을 알아차리게 하였다. 유리창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움직임, 가늘게 흘러가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흐릿한 달빛이 벽에 닿는 소리까지도 우리의 육체적 감각이 포착해 냈다. 어두움과 고요함은 정중동의 상태로 다가왔다. 겉으로는 고요하지만 그 안에서는 무수한 생명의 움직임이 꿈틀거린다. 어둠은 우리의 지각을 깨우고 있었다.
수도사들에게 어두움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은 어둠 속에서 기도하며 빛을 갈망했다. 육체를 억제하고 영혼의 정화를 추구했던 수도원의 삶은, 사실 오래된 철학적 전통 위에 서 있었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어두움과 그림자 그리고 이데아에 대한 그 시대의 관념을 설명하였다. 그는 어두움과 그림자를 실제 사물의 허상으로 비유하면서 현실의 세계, 즉 인간이 오감으로 감각하는 세상은 이상향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그의 이데아론은 세상을 두 가지의 관념으로 나누어 우열을 가늠하는 이원론으로, 어두움과 그림자, 육체와 같은 감각의 영역을 세속적인 것으로 빛, 이성, 이데아를 영원하고 성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이렇듯 어두움은 오랜 시간 우리에게 부정적의 의미로 인식되어 왔다. 우리는 빛을 계획한다고 이야기하지 어두움을 디자인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어두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빛의 의미를 알 수 있었을까? 육체의 감각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이성이 지향하는 이데아를 그릴 수 있었을까?
빛은 어두움이 있으므로 그 의미를 갖는다. 내가 어두움 속에서 발견한 감각들은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어두움이 있으므로 우리는 작은 빛을 발견하고 미세한 움직임을 발견하고 그것이 갖는 의미를 성찰하게 된다. 빛이 이성이라면 어두움은 육체다. 그런데 나는 이 수도원에서 깨달았다. 몸으로 부딪혀 알게 되는 진실이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였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몸을 통해 경험한 것들로 이성의 토대를 만들어 간다. 몸으로 부딪혀 깨닫게 되는 진실은 언제나 머리로 생각해서 알게 되는 것들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러므로 세상을 두 가지로 나누어 우열을 가늠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수도사들이 추구했던 빛은, 실은 어둠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었다. 어두움이 커질수록 작은 빛이 더욱 또렷이 살아났다. 세상은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비추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이해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