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석회암으로 재건된 언덕의 빛

시칠리아의 라구사

by 김보아


"모두가 땅의 심장에서 홀로 서 있다
태양의 한 줄기 빛에 찔려:
그리고 곧 저녁이 된다." - 살바토레 콰시모도(Salvatore Quasimodo)


이탈리아의 가장 남단에 위치한 시칠리아는 아프리카와 유럽의 한가운데, 지중해에 위치하는 섬으로 수천 년간 그리스, 로마, 아랍, 노르만, 스페인 등 다양한 문화와 문명이 이곳을 지나가며 다양한 건축적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다. 드높은 산지와 광활한 평야가 공존하고 바다로 둘러싸인 해안선과 고지대 언덕 마을이 시칠리아 전역에 형성되어 있다. 시칠리아는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자동차로 6-7시간은 달려야 다다를 만큼 커다란 섬이다. 섬의 동쪽에는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는 에트나 화산과 1693년 대지진 후 재건된 라구사로 유명한 카타니아지역이 있고 서쪽에는 아름다운 해변과 활기 넘치는 현지인의 일상생활로 역동감이 넘치는 팔레르모 지역이 있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로 알려져 있는 동북쪽 바게리아(Bagheria) 지역은 나의 최대 관심지 중 하나였다. 그곳을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중심가에 옹기종기 모여 아이스크림을 먹고 작은 공연을 함께 보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그 사람들 틈에서 영화의 주인공, 토토가 달려 나올 것 같았다. 고지대의 고립된 마을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그 마을의 모든 어른들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다. 모두가 부모이고 모두가 자식이다. 마을의 경계에 서니 저 멀리 산의 등줄기와 평야가 눈 아래 펼쳐진다. 그 품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토토가 어른이 되어 돌아와, 자신을 성장시킨 동네, 대지 그리고 더 할 수 없는 사랑의 유산을 남긴 알프레도라는 이름에 느꼈을 먹먹함이 전해졌다. 시칠리의 첫인상은 대지, 어머니, 사랑, 풍요로움 같은 것들이었다.


시네마천국 촬영지 바게리아 ©boah


내리쬐는 건조한 태양에 익숙해질 때쯤, 나는 바게리아의 따뜻한 풍경을 뒤로하고 또 다른 시칠리아의 얼굴, 석회암의 도시 라구사(Ragusa)로 향했다. 라구사는 바게리아처럼 높은 산지에 형성된 계단식의 도시로 시칠리아 남동부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이다. 고대부터 존재해 온 도시의 토대 위에, 대지진 이후 바로크 양식으로 새롭게 재건된 이 도시는 언덕과 협곡이 만들어낸 복잡한 지형 위에, 두 개의 영혼이라 불리는 라구사 이블라(Ragusa Ibla)와 라구사 수페리오레(Ragusa Superiore)로 나뉘어 존재한다. 라구사 이블라 지역은 대지진 이전의 모습을 간직한 역사적인 구역이다. 좁은 골목길과 계단으로 이어진 고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정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라구사 수페리오레 지역은 대지진 이후 재건된 신시가지로, 현지인들의 상업 및 행정의 중심지로 사용되고 있다. 넓은 광장에는 상점과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고 이면도로의 계획도 격자형으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주차를 하고 무작정 언덕을 향해 올라가는 길, 얼마나 더웠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boah


잘 계획된 라구사 수페리오네 지역, 더위를 식히기 위해 먹었던 젤라또 가게가 보인다 ©boah


1693년 대지진이 일어나고 이곳 사람들은 이 도시의 재건에 힘썼다. 라구사는 수백만 년 전의 해양 퇴적물로 형성된 석회암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어 도시를 재건하기 위한 재료로 석회암을 사용했던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수송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고 석회암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건축재료로의 사용을 용이하게 했다. 석회암과 같이 강도가 무른 돌은 가공이 쉬웠고 시공 후 공기 중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석재가 단단해지니 유지보수에도 유리했다. 라구사의 건물들은 대부분 건물의 정면이 남향 혹은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햇빛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슈페리오네 라구사에서 이블라 라구사 지역으로 향하는 길에서. 대지진 이전의 모습 그대로 보존된 오래된 마을 ©boah


석회암(Pietra di Ragusa)기반의 밝고 따뜻한 색조의 건물들은 태양빛을 반사시켜 눈이 부시도록 도시전체를 밝게 하고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건물의 표면이 시간대에 따라 다양한 색감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같은 벽인데 아침에는 크림색이고, 정오에는 거의 흰색에 가깝고, 저녁에는 장미빛이었다. 왜 그럴까?

석회암의 비밀은 그 성분에 있었다. 탄산칼슘(CaCO₃)으로 이루어진 이 돌은 빛이 통과할 때 복굴절—빛이 두 방향으로 나뉘는 현상—을 일으킨다. 그래서 빛의 각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돌의 표면에서 반사되는 색이 변하는 것이다. 다공성 구조는 빛을 흡수하지 않고 산란시켜, 부드럽고 따뜻한 색조를 만들어냈다

더욱 가까워진 이블라 라구사 지역, 계단을 통해 가장 위 마을까지 올라가려고 한다. ©boah
이블라 라구사 언덕까지 올라오니 슈페리오네 라구사의 모습이 한 눈이 들어온다. 둘은 닮은 듯 다르다 ©boah


저녁 시간이 되자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도시가 금빛 또는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언덕 위에 자리한 계단식의 이 도시는 건물마다 햇빛을 받는 방향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색감도 달라진다. 빛이 정면으로 수직에 가깝게 닿으면 강한 밝기와 높은 반사율로 색이 선명하고 밝게 보이고 빛이 비스듬히 낮은 각도로 닿으면 부드럽고 대비가 약해져 빛이 거의 닿지 않는 부분이나 반대편은 차갑고 어둡게 보였다. 같은 석회암 벽이라도 햇빛을 정면으로 받는 쪽은 황금빛이 도는 반면, 측면은 붉은빛이나 푸르스름해 보이기도 하였다. 밤이 되자 건물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조명이 켜졌다. 업라이트 방식이었다. 빛이 벽면을 타고 올라가며 바로크 양식의 조각과 석회암의 질감을 강조했다. 가까이 다가가 조명기구를 들여다보니 뜨겁지 않았다. LED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이 건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자외선과 열이 적은 조명을 선택한 것이었다.


라구사의 야경, 벽면을 따라 흐르는 외벽의 불빛들 ©boah
뜨거웠던 한 여름의 열기를 식혀줄 음료를 주문하고 저녁 하늘을 감상하였다 ©boah


저녁 무렵 야외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에 앉으니 어느새 옷을 바꿔 입은 하늘의 노을빛이 언덕으로 내려와 있었다. 석회암 벽들이 장미빛으로 물들었다. 아침의 크림색도, 정오의 흰색도 아닌, 하루의 마지막 색이었다. 1693년 이곳은 무너졌다. 그리고 70년 동안 다시 쌓아 올렸다. 한 세대, 어쩌면 두 세대가 걸린 시간. 지금 내 눈앞에서 노을을 받고 있는 이 석회암 벽들은, 그때 쌓아 올린 돌이었다.

빛의 굴절 때문에 벽의 색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나는 이 도시를 다르게 보게 되었다. 같은 돌인데 빛의 각도에 따라 다른 색을 보여준다.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모습의 크림색으로 빛날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