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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빛, 사라지는 빛

제노바

by 김보아
"때로 나는 거리의 카페들이나 박물관의 고상한 숲을 떠나
자유롭고 신선한 향기가 가득한 레몬나무 길을 걷고 싶어진다
이곳에서 빛은
황금빛 거품 속에 조용히 퍼지고
바람조차도
그 향기에 깃든다.
나의 고통 속에서도
이런 고요한 빛의 충만함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삶은 조금은 견딜 만해진다." - Limoni, 1925



탐험가 콜럼버스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제노바는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 해안에 자리한 항구도시이다. 아펜니노 산맥이 도시의 북쪽을 감싸고 남쪽은 지중해를 향해 활짝 열려 있어 해안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면 누구라도 새로운 땅을 향해 탐험의 길을 떠난 콜럼버스의 기백이 전해져 옴을 느낀다.


점심때쯤 제노바의 피아짜 프린세페(Genova piazza princepe) 기차역에 도착한 나는, 아침도 거르고 출발한 탓에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재빨리 항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다에 다가갈수록 저 멀리 바다의 향이 빛을 타고 불어왔다. 좁은 해안선을 따라 밀집된 건축물들의 얼굴들은 산비탈을 따라 촘촘히 서서 일제히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테라스 형태의 도시구조는 해가 떠오르고 지는 순간마다 극적인 빛의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건물의 형성 자체가 경사면을 따라 높낮이와 깊이를 다르게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입체감이 더해지고 바로 인접한 푸른 지중해로부터 반사되어 튀어 오르는 빛과 바다의 수증기는 운명처럼 만나 부서진다.



바다를 향해 둘러선 도심의 건축물들 ©boah



지중해는 짙고 아름다운 푸른색을 띠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는 빛의 성질에 있다. 여러 색깔이 섞인 햇빛이 바다에 닿으면 빨간색이나 노란색 같은 따뜻한 색깔은 물속으로 빠르게 흡수되어 사라지고, 파란색 계열의 색만 표면에서 잘 튕겨져 나온다. 그 이유는 파장이 긴 따뜻한 색깔은 물속으로 들어가면 힘을 빨리 잃어 물속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반대로 파장의 길이가 짧은 파란색은 힘이 강해서 물속에 흡수되지 않고, 표면에서 튕겨져 나오기 때문이다. 지중해는 특히 햇빛이 아주 강하게 내리쬐는 지역이기 때문에, 표면에서 반사되는 파란색 빛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고, 이로 인해 짙고 아름다운 푸른색이나 청록색으로 보인다. 빛이 이렇게 색을 걸러내며 우리에게 바다의 무게를 전한다.


지중해 연안 특히 제노바 근처의 리구리아 해안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수심이 비교적 깊다. 깊은 수심은 바다색을 더욱 짙고 어둡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얕고 하얀 모래가 깔린 해저는 밝고 맑은 에메랄드빛을 띠지만, 제노바 주변의 암반과 깊은 지형은 푸르고 짙은 색감을 만들어낸다.


흥미롭게도 바다의 생물들의 색채 역시 이러한 빛의 법칙을 따른다. 바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난색계열의 빛은 모두 흡수되어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빨강이나 주황계열의 색을 가진 생물들은 실제로 거의 보이지 않아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에 유리하다. 수면 가까운 곳에 사는 생물들은 반대로 푸른색, 은색 혹은 투명한 색을 가져 스스로를 보호한다. 특히 물고기들 중에 등 쪽은 어둡고 배 쪽은 밝은 색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아래에서 보았을 때는 밝은 하늘과 비슷하고 위에서 봤을 때는 어두운 심해처럼 보이게 하는 역음영(countershading)은 빛과 바다의 색,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생물체의 색은 자연이 만들어낸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생존 전략인지를 보여준다.



제노바 항구의 풍경 ©boah



무심코 받아들였던 주변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생각하지 못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빛이 그 사물에 닿았다가 튕겨져 나오는 색상들이다. 그 외의 색을 볼 수 없는 이유는 모두 그 사물 속에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조차 우리 눈이 판단하고 인지할 수 있는 것들에 제한된다. 예를 들어 자외선은 우리가 볼 수 없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태양빛이 뜨거운 여름날이면 누구나 실감할 수 있다.

검은색은 모든 빛을 다 흡수해 버렸으므로 그 모든 색이 다 혼합되었을 때 얻어지는 색인 검정으로 우리 눈에 인식된다. 흰색은 그 반대이다. 빛이 만들어낸 색은 사물의 성질에 따라 달라지므로 색은 사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는 요소가 된다. 생각해 보면 무언가가 나에게 닿았을 때 자연스럽게 흡수되고 사라져 버리는 것들보다, 받아들이기에 불편하고 어색한 것들이 내 모습을 드러나게 한다. 나의 반응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충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색은 짙어진다.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 되고 이미지가 될 수 있다.


한 나절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은 도시 제노바의 시선의 끝에는 언제나 바다가 닿아 있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그리움과 용기로 언제든 떠날 기세로 서 있는 도심의 건축물들의 빛은 하늘과 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끝없이 순환하면서 변화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빛이었다. 빛은 흡수와 반사의 끝에서 우리를 비춘다. 그 푸른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본다는 것은, 나 또한 하나의 파장으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어쩌면 그 순간 고통 속에서 만나는 고요한 빛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될지 모른다.



길을 걷다 우연히 지나치게 된 제노바 대학교, 계단을 통해 끝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그야말로 경사로에 세워진 대학교이다. 중정을 통해 흘러내려오는 빛이 너무나 가시적이다. 지나가는 학생에게 말도 걸어볼 겸 기념사진을 한 장 부탁하였다. ©b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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