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나
“경사진 광장에 앉아 사람들을 본다.
따스한 햇살,
한참을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평화롭고 부드러운 공기가 가득하다.
이것만으로 마음이 상쾌해진다.
무슨 힘일까?”
첫 번째 워크숍이 끝나고 나는 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룹과제로 인한 피로감은 쉬이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밀라노에서 차로 4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토스카나 지역의 시에나를 떠올렸다.
‘떠나자’
온라인으로 정확히 자동차 렌트를 예약했으나 자동차 픽업 당일 영업소로부터 반납일이 휴일이니 하루 더 연장을 하고 반납을 하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바로 차를 픽업하지 못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 시간을 소요한 뒤 드디어 차에 올랐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나는 이탈리아인들의 운전습관을 처음 직관하게 되었는데 차선을 변경할 때 깜빡이를 켜는 일은 선택 사항이고 칼치기로 끼어드는 것은 오히려 애교에 가까웠다. 시간이 지날 수로 꿋꿋하게 깜빡이를 넣고 차선을 변경하는 내가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규칙을 지키는 것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바보가 된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웬만한 일에 시비가 붙지 않았다. 별로 놀라지도 않고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불법이 평온히 난무했다.
분지의 광장토스카나에 다가올수록 들판의 펼쳐진 들꽃들의 물결이 나를 환영하는 듯 바람에 손을 흔들어 댔다. 달릴수록 아름다워지는 바깥 풍경에 넋을 잃고 길을 따라갈 때쯤 나는 내가 어느덧 언덕길로 접어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시에나는 Y자로 뻗은 세 개의 능성 위에 자리 잡은 언덕 위에 도시로 시에나의 도로들은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직선이 거의 없고 굽어져 있다. 이렇게 미로처럼 형성된 골목길들은 도시의 중심부 광장에서 만난다. 그곳이 꿈에도 그리던 캄포광장(Piazza del Campo)이다.
나는 호텔에 차를 주차하고 길을 나섰다. 잠시 후 큰 광장이 보이고 ZTL(교통제한구역) 싸인이 서 있는 것을 보니 내가 도심의 중심부를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마침내 어느 골목의 끝에 펼쳐진 광장이 내 앞에 드러났다.
나는 광장 주변을 서성이며 맴돌다가 어느 경사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면에는 종탑인 토레 델 만자(Torre del Mangia)가 하늘 끝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과히 피렌체의 두오모 종탑과 대결 구도를 형성했을 법하는 생각이 든다. 늘 경쟁과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에나 시민들의 모습이 광장 위에 어른거렸다. 그다음으로 눈길을 끈 것은 푸블리코 궁정(Palazzo Pubblico)으로 경사진 광장의 가장 낮은 지점에 자리해, 부채꼴 모양의 바닥의 끝 점이 모이는 그야말로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위치에 자리했다. 그 주변으로는 귀족들의 주택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통일된 지붕선과 재료는 정해진 규격을 지켜 일체감을 이루고 있었다.
캄포광장의 특별함은 경사진 바닥면이다. 광장에 들어서면 경사로 인해 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느낀다. 시선이 앞으로 당겨지고 빛은 경사면의 위치에 따라 비대칭적으로 펼쳐진다. 평지보다 빛의 흐름이 동적이며 역동적으로 퍼진다. 경사면은 걸어서 지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걸음을 멈추고 머무는 공간으로의 안정감을 제공한다. 아무 곳에나 앉으면 그곳이 나의 자리가 된다.
기울어진 경사면은 마치 연인의 어깨 같다. 나로 하여금 편안하게 기대게 한다. 광장에 들어 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앉아 쉴 수 있는 것은, 지면의 기울어진 형상 때문이다. 아무렇게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생동감이 넘친다. 나는 광장을 이곳저곳 걷다가 어느 지점에 앉아 지면에 기대어 보았다. 뻥 뚫린 광장의 하늘, 구름 사이로 퍼져 들어오는 빛은 헤링본 벽돌의 패턴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솟아오르는 푸릇푸릇한 풀잎마다 오밀조밀 닿고 있었다.
광장 맞은편에 경사에 기댄 사람들을 본다. 모두 다른 얼굴, 다른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모두가 다르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인간이 신이라면, 완벽하다면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 다르다는 건 어쩌면 우리가 서로 온전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모습이 나와 다른 건 그의 탓도 나의 탓도 아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모습으로 태어나 자신의 한계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일 뿐. 거기에 어떤 이유도 이해 못 할 논리도 없다.
광장에는 개개인을 하나로 인식하게 하는 힘이 있다. 펼쳐진 하나의 공간에 쏟아지는 하나의 빛은, 서로 다른 감정과 경험을 가진 이들이 공유하는 또 하나의 감각 같은 것이었다. 지치고 힘들었던 마음이 저 멀리 파도치듯 구불거리는 광장의 곡선을 따라, 이곳에 모인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것을 나만이 느꼈을까? 이 기울어진 공간에서, 같은 빛 아래에서 나는 무수히 많은 익명의 얼굴들 속에 숨어있는 익숙한 얼굴들을 보았다. 그들의 다름을 인정해 본다. 잘하면 우리는 각자의 무게를 나누어질 수도 있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몸이 먼저 이해 가는 이 광장의 자리에서, 광장으로 내리는 빛은 나와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므로 나를 발견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확인하게 해 주었다. 빛은 경사면의 위치에 따라 비대칭적으로 펼쳐져 사람들의 표정을 다르게 비추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길어지는 그림자는 광장의 분위기를 더욱 역동적으로 바꾸었다. 나는 그곳에 앉아 참으로 오랜만에 정처 없이 타인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결국 혼자이지만 때론 너무나 혼자이고 싶어 발버둥을 치기도 하지만 언제나 서로를 바라보는 존재들이다. 그 시선의 근본에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