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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Sep 17. 2019

살다보면 타인의 빈자리가 보일 때가 있다.

 토요일 오후, 나는 우리집 거실에 있다. 거실 한 켠의 창가에 있는 나의 책상에 앉아 아파트 중정 위로 뚫린 하늘을, 저 멀리 고층 아파트 뒤로 물러서 있는 산을 올려다보고 있다.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비긴어게인의 버스킹곡이 흐르고, 살짝 열어 둔 창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을 따라 속커튼이 리듬을 탄다. 커피를 머금은 머그잔의 온기가 나의 마른 손바닥 안에서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다. 나는 지금 온전히 이 공간 속 분위기 안에 있다. 나는 오늘의 공간을 기억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우리는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공간과 더불어 살아간다. 공간을 채우는 건 우리의 삶이기에 어떤 공간에든 그 공간에는 삶의 이야기가 녹아있다. 때론 슬프고 때론 외롭다. 즐거움이 가득했던 거실이 있고 그리움이 가득한 창가에 작은 의자가 있다. 웃음이 넘쳤던 저녁의 식탁이 있고 다정한 대화가 흐르던 서재의 탁자가 있다. 숨죽여 눈물을 흘렸던 욕실 안 샤워부스도 있다. 발코니 발매트에는 반려견의 사랑스러움이 떨어져 있고 현관문 손잡이에는 아쉬웠던 이별의 순간이 묻어있다.


지난주였다. 분당에 업체 미팅 때문에 갔다가 근처에 사는 친구를 점심시간에 만났다.

"아픈 팔은 좀 괜찮아?"

"그냥 그래... 잘 낫지를 않네...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그냥 아프다고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는데, 기댈 곳이 사라진 게 여전히 힘드네... "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났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슬픔은 더 깊어가는 듯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오빠랑 올케언니랑 한 집에 같이 사셨어. 이제 그 집에는 오빠의 가족만이 살고 있고......  그런데 엄마가 너무 그리 울 때는 그 집에 가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이것저것 핑계를 만들어서 가보려고 하면, 올케언니가 오빠를 통해서 필요한 물건을 보내거나, 밖에서 만나자고 해서 가볼 수가 없었어. 엄마 돌아가시고 3년이 지났는데 한 번도 못 갔어..."

엄마가 병상에 계실 때 하루가 멀다 하고 친정에 찾아가서 엄마를 돌보던 친구였다.

"엄마가 계시지 않은 집인데도 그렇게 가보고 싶어?"

"응... 엄마가 계시던 곳이니까, 내가 자주 가서 엄마랑 지내던 곳이잖아"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친정집은 여전히 그녀에게, 그립고 보고 싶은 애틋한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서 그녀는 사랑을 팔베개하고 위로와 포옹하고 다정함과 눈 맞췄었다. 엄마를 만날 수 없어도 그곳에 가면 다시 그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까?


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다큐 감독인 은정은 2년 전에 남자 친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는다.  그 후 은정의 죽은 남자 친구의 환영은 그녀의 모든 일상의 공간에 나타난다.  그녀와 대화하고 밥을 먹고 거리를 걷고 감정을 공유한다.  은정은 남자 친구가 살아서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죽은 남자 친구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고 의리라고 믿었던 걸까?  그녀의 모든 공간은 다시 죽은 남자 친구의 환영으로 채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녀는 보이지 않는 남자 친구와 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은정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내가 존재하는 공간이 내 몸보다 작게 느껴질 때가 있어. 내 몸을 으깨서 그 공간의 크기에 맞추고 다시 끼워 넣는 것처럼 아파. 그렇게 또 그 공간에서 빠듯하게 숨을 쉬고 그렇게 또 난 버텨야 돼. 널 기억해야 하니까 참... 너.... 나쁘다"


이별을 겪은 사람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현실은 그 대상의 부재에 대한 인식이다. 남겨진 자는 그가 머무는 모든 곳, 스치는 모든 공간에서 떠난 이의 빈자리를 느낀다.  빈자리가 주는 슬픔과 공허함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뭔가 다른 대상을 찾아야 할까? 아니면 기억의 장소로부터 도망가야 할까?  어떻게 하면 목에 걸려 삼켜지지도 않고 뱉어낼 수도 없는 떠난 사람에 대한 기억과 슬픔을 통과해서 보통의 삶의 자리로 옮겨갈 수 있을까?  롤랑 바르트는 그의 책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의 구조를, 사랑하는 주체와 떠나는 대상의 관계로 보았다. 사랑의 대상은 늘 떠나간다는 것이다. 사랑은 정박하지 않으며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그녀의 그도 떠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홀로 남았다.  떠나고 없는 과거의 사람을 현재의 공간에 묶어두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고 허공을 향한 혼잣말은 너무나 외로운 독백이다.  


과거 공간속의 은정과 남자친구


그녀는 남자 친구와 자주 갔던 식당을 찾아간다.  그와의 추억의 공간 속에서 이제 홀로 밥을 먹고, 홀로 그 길을 다시 걸었다. 과거의 공간 속에서 더 이상 그가 없는 "지금"과 마주한 하루 동안 그녀에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을까?  2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그날 밤 그녀는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나 힘들어... 안아줘......"

눌려있었던 슬픔의 감정이 현실 속에서 형상을 드러냈다.  다독여지고 어루만져진 마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은 사랑의 주체다. 사랑함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은 늘 떠날 채비를 하는 듯하다. 어떤 형태로든, 언젠가는 우리를 떠나가는 것 같다. 그 빈 공간에서 우리는 대상의 부재를 소화해내야 한다. 그 과정이 순조로울 수 없다. 마음이 부대껴 편안히 잠을 잘 수도 없고 시원한 웃음도 웃어지지 않는다. 혼자가 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고 가엽다. 채도가 떨어진 체 침울하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 하지만 말해주고 싶다. 외로움의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당신은 아름다웠다고 그리고 당신의 삶은 또다시 빛날 거라고 말이다. 오랜 침묵의 시간이 지나면 그 빈 공간은 다시 당신 안에 있는 사랑으로 채색되고 온기 가득한 위로와 다정함이 흘러넘치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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