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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Sep 23. 2019

언제가는 나도 나의 빈자리를 보게 될 것이다.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

  "이원을 회사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다가 길가에 차를 세운다. 담배를 피우며 아침 풍경을 바라본다. 전철역 앞 나의 주차 장소는 텅 비어 있다. 매일 나의 낡은 차가 서 있던 곳. 나를 일상으로 떠나보내고 늦은 밤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그 자리. 그 빈자리에서 마음이 또 툭 꺾인다." (아침의 피아노, 김진영 저)   



 "아침의 피아노"는  저자가 어느 날 암 선고를 받고 투병을 시작하면서 써 내려간 매일의 기록이다. 환자가 된 순간부터는 누구를 만나도 그저 "환자"라는 의 자세가 된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흔히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건강을 잃으면 다 소용없다고도 한다.  그래서일까? 환자가 되면 누구를 만나도 서로를 대하는 것이 예전 같지 않다.  아무 얘기나 거침없이 떠들던 친구들의 이야기가 조심스러워진다.   좋은 일은 좋은 일이라 나누기 힘들고 힘든 일은 힘든 일이라 꺼내기 쉽지 않다. 형식적인 위로도 막연한 희망도 선뜻 이야기하기 어렵다.  타자에 의해 또 스스로, 환자의 삶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삶으로, 아무 소용도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듯하다. 그러나 환자가 되어도 일상의 삶은 이어져야 한다. 단지 지금까지의 삶의 공간에서 조금은 낯선 삶의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뿐이다. 누구에게나, 옮겨갈 수밖에 없고 가볍게든 무겁게든  언젠가는 열릴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환자의 삶은 이중생활이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 안에서 산다. 이 존재의 패러독스 위에서 그는 자신만의 삶, 단독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모두의 삶과 만나야 한다. 그것이 단테가 구상했던 신생 Vita Nova이었다."(아침의 피아노 중에서, 김진영 저)


 저자는 환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려고 노력하면서 일상의 삶도 유지하고자 했다.  다만 환자로서의 삶과 일상의 삶을 분리하려 했다. 일상의 삶을 살 때는 환자의 삶을 망각하고 환자로서의 삶을 살 때는 일상의 삶을 차단하여 두 삶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이 없이 늘 조용하고 무사하기를 바랐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환자의 삶을 살면서도 늘 추구해왔던 "삶의 명랑성"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을 자신의 자긍심, 철없이 즐거운 정신이라고 하였다.


"아침산책. 또 꽃들을 들여다본다. 꽃들이 시들 때를 근심한다면 이토록 철없이 만개할 수 있을까."( 아침의 피아노 중에서, 김진영 저)


투병 초기, 저자는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역 앞, 자신의 주차 장소가 텅 비어있는 것을 보게 된다. 매일 자신의 자동차가 서 있던 곳,  일터로 나가는 하루의 시작에 늘 마주했고 하루를 마감하면서 늘 머물렀던 공간에서 더 이상 자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 현실을 보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것이 된 환자의 삶은 늘 당연하게 이루어졌던 일상,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었던 삶의 루틴을 바꾸어 버렸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듯 보였던 보통의 일상이 더 이상 자신과 상관 없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특별한 무언가를 잃어버려서 느끼는 상실감보다 더 무거운 것일지 모른다.  누구나 무심히 지나치는 콘크리트 위의 흰색 선을 바라보며 저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마음을 다잡고 괜찮다... 말해도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마음이 수없이 무너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왈칵 눈물이 솟을 때마다 눈물을 겨우 참고 되뇐다.


 

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저 공간을 보고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오직 저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주는 슬픔이다.


 '나는 깊이 병들어도 사랑의 주체다. 울 것 없다. 그러면 됐으니까'( 아침의 피아노 중에서, 김진영 저)


 저자는 환자가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의 자긍심을, 자신을 "사랑의 주체"로 인식함으로  가능케 하였을까? 자신이 을의 위치라 느껴지는 순간에도 자신을 사랑받아야 할,  위로받아야 할, 배려받아야 할 존재가 아닌 능동적인 사랑의 주체로 존재하고자 했고 마지막까지 그것을 되뇌었다. 생의 마지막, 자신의 빈자리에 남겨져야 할 것은 오직 사랑임을 믿었고 존재의 이유와 의무라고 생각했다.



 문득 어릴 적 TV에서 본 영화가 떠올랐는데 제목도 주인공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아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니 질 킨몬트라는 스키선수의 실화를 영화한 "저 하늘의 태양이"였다. 스키선수였던 그녀는 여러 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전도유망했으나 올림픽 출전을 결정하는 대회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큰 수술을 받고 깨어난 그녀는 하반신 마비가 된 현실과 마주한다. 스키선수로서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온 시간들을 지나 이제 자신이 목표로 했던 것에 다다르려는 그 순간에 그동안의 모든 노력과 헌신과 열정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자신의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자신 앞에는 본 적도 없고 알 수 도 없는 또 다른 미지의 세상이 놓여있었다. 피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그 세상에서 그녀는 누구보다도 약자였다. 이전에 그녀에게 찬사와 존경을 보내던  모든 이들의 마음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뀌었다. 절망의 시간 끝에 질 킨몬트는 재활을 시작했다. 아마 오랜 시간 노력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녀는 남자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자신의 상태가 놀라울 만큼 호전됐다.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남자 친구는 벅찬 기대로 그녀를 찾아간다. 영화를 보며 나도 그녀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기를 기대하며 마음을 졸였다.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남자 친구에게 그녀는 휠체어를 타고 등장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마치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날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인사를 하고 기적을 기대하라는 듯 말했다.


 "짜잔~~~~~"


 그녀는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감자칩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위태롭게 잡았다. 아니 겨우 걸쳐 놓았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리고는 아주 조금 위로 감자칩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으나 남자 친구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마 그녀를 떠난 것으로 기억된다.

 


스키선수에서 교사가 된 질 킨몬트( 영화 "저 하늘에 태양이”중에서)


얼마 전에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가 TV가 너무 오래돼서 아무래도 새 것을 사야 하는데  좀 골라 달라고 하셨다.  전반적으로 색감이 바래졌고 한가운데 생긴 선이 생겨서는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그 TV는 화질이 형편 없어져서 볼 수가 없으니 새로운 TV을 구입하는 대로 폐기 처분될 것이다. 본질을 잃어버린 물건은 더 이상 그 물건이 아니다. 사람은 어떠 한가? 스키선수가 되기 위해서 살아왔으나 더 이상 스키선수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닌건가? 사람은 무엇이 되기 위한 어떤 목적을 정해 놓고 살아가고 그 적합여부에 따라 가치가 판단되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자신을 규정하지 않으며, 삶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끊임없이 구현시켜나간다. 그러기에 그 끝을 알 수 없고 늘 변화하고 생동하는 존재다. 그 후 질 킨몬트는 인디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사가 된다.  그녀가 스키선수던 교사던 젊던 늙었던 건강하던 아프던 그녀는 변함없이 질 킨몬트이다.  하나의 세상을 잃어버린 그녀는 새롭게 열린 세상에서, 아이들의 선생님으로서 능동적인 삶을 열어나갔다.  그녀는 삶을 통해 사랑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자만이 스스로를 세우고 존귀하게 하는 생의 마지막 비밀을 아는 자라고 아야기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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