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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May 07. 2020

그 남자, 그 여자

나의 공간속으로 들어 온,

사소한 작업,


우리집 거실 복도 끝에는 수납장이 하나 있다.  수납장의 모양새를 보면 설계하신 분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전체 길이의 3/4을 차지하는 상단부에는 문이 달려 있으니 내부에 뭐든 수납을 하면 되고 나머지 1/4는 오픈시켜 놓았으니 그럴듯한 오브제라도 올려보시라는 것. 게다가 조명까지 매입되어 있으니 의도는 더욱 명확해 보였다.  하지만 살다 보면 조금조금 늘어나는 살림살이에 수납공간은 늘 부족해지고 오브제는 제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자리를 잡게 되는데 그것이 지나다닐 때마다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문짝을 새로 달기에는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형국이다. 궁리 끝에 인터넷으로 천 두장을 구입하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반천은 아니고 벽걸이 용으로 제작된 패브릭이다. 희고 두툼한 천에는 앙리 마티스의 드로잉이 프린트되어 있는데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결과가 만족스럽다. 일단 벽걸이용이라 천이 흐들거리지 않아 목문 아래 달아도 기죽지 않고 단단히 버티는 힘이 있어 좋다.


거실장 아래에 걸어 본 패브릭 벽걸이 | 내가 지날 때 마다 말을 거는 것 같다.  ©boah



남자와 여자,


이렇게 앙리 마티스의 남자(그란테 카티아)와 여자(나디아)가 나의 거실 한편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집안을 오가며 그 그림과 마주칠 때마다 저 둘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마티스는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야수파 화가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저 두 작품은 마티스의 노년 때의 작품으로 동판화 기법 중 하나인 애퀴틴트로 제작되었다. 야수파 화가로서 그가 보여줬던 선명하고 강렬했던 작품들과는 달리 그 선이 매우 간결하고 단순하다. 그 선의 강렬함은 그것이 놓인 공간 속 모던한 라인의 가구와 무표정한 벽면 속에서 생동감을 더하는 것 같았다. 방을 나와 거실로, 주방으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마주치는 두 얼굴이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가 않다. 마티스가 두 사람의 얼굴에서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둘을 지나갈 때마다 나의 시선을 붙잡고 잘 놓아주지를 않는다.


여자의 얼굴,


여자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있다.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저 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눈을 언제나 꿈을 꾸는 듯하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릿결과 동그란 얼굴선에서 부드러움이 전해져 온다. 그녀가 처한 현실이 어떠하든 그것과 날카롭게 대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몸을 살짝 비껴 서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자신이 바라는 그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보다 꿈을 꾸기로 했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 내가 바라는 나의 미래를 마음에 담고 그 꿈을 바라보기로 하였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나는 내가 아니다.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해 본다.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면서 미래에 그려질 자신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미소는 희미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따스하지만 슬픈 비가 내리는 것 같다. 그래도 그녀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남자의 얼굴,


정면을 바라보는 남자의 굳은 얼굴은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남자의 얼굴에는 건조한 높새바람이 분다. 진한 눈썹과 날카로운 턱선은 너무 완벽해서 틈을 보이지 않는다. 아래로 곧게 뻗은 콧날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듯 꿈쩍도 하지 않을 기세이다. 현실이 자신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절망스러운 일이 생겨도 '어 그래,  절망!' 하고 바라볼 뿐이다. 눈 앞에 고통스러운 상황이 펼쳐 저도 회피하지 않는다. 현실이 어렵다는 걸, 사는 게 원래 이렇다는 걸 그는 어린 시절 어느 지점에선가 체득한 모양이다. 그가 자라온 환경이, 젊은 시절 그를 고민하게 했던 그 시간들이 아마 그를 이렇게 단련시켰는지 모른다. 모든 걸 인정함으로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절망도 고통도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그에게는 회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건조함에는 편안함이 주는 따스함이 스며있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옅은 미소가 머금어 있다. 그 미소는 그만이 소유할 수 있는  진짜 행복이다.


남자와 여자는 충분히 달랐다. 그런데도 저 둘을 저렇게 같이 붙여 놓으니 볼수록 다정하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심지어 같은 곳을 보고 있지도 않는 듯하다. 그럼에도 꿈을 꾸는 여자 옆의 남자는 꿈을 꾸지 않아도 행복하고, 현재가 두렵지 않은 남자 옆에서 여자는 현재의 아쉬움을 잊는다. 오늘도 저 그림을 지나며 흘깃 바라보며 바래본다. 저 둘이 기왕 우리 집에 왔으니 이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b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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