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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Nov 21. 2020

무모함에는 손해가 없다

낭만은 덤입니다


가구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드디어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공사현장에서 언제나 보고 듣던 나무 자르는 모습과 소리, 끝없이 휘날리는 톱밥 가루 등은 나에게 낯선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지켜보는 것과 내가 직접 해보는 것은 또 다른 얘기였다. 시작과 동시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내 안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삶은 역시나 그런 것. 그 여정을 다 꿰뚫어 볼 수 없기에 흘러간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언제나 내 안에 더 확실하다. 그냥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리 이것저것 따져본다고 해도 결국은 그 길로 간다. 사실은 몰라서 이 생각도 하고 저 생각도 해 보는 것이다. 모든 걸 알 수도 없지만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뒷걸음치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즉흥적이거나 귀가 얇아서 남의 말만 듣고 뭐든지 바로 시도해 보는 스타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그 점이 오히려 나의 약점이다. 무턱대고 해 보는 것도 좋은데 나는 그게 어렵다. 많이 심사숙고한다. 그런데 그 심사숙고라는 것도 늘 나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국 나는 수많은 시간을 생각하다가 사실상 거반 모르는 체로 뭔가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늘 막연한 기대감과 낭만삘이 동반된다. 그 약간의 천진난만함이 나의 강점이다. 뭐든지 장고 끝에는, 마치 내가 소설 속의 주인공인 양 독백을 하면서 길을 나서 보는 것이다. 가구 공방에 발을 디딘 것도 그 비슷한 그림에서였다.


TV가 없는 우리 집의 거실은 사실상 비어 있다. 큼지막한 소파가 주인인 양 그 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는 게 아까워서 나는 거실을 내 서재로 사용하기로 했다. 기존에 내가 사용하던 책상을 서재방에서 빼놓으니 너무 크고 징그러웠다. 게다가 15년 가까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용한 탓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림이 심했다. 6년 전쯤 나는 그 테이블을 살려보려고 열심히 페인트칠을 하기도 하였다. 아까워서 부둥켜안고 있던 테이블을 이제 과감히 보내기로 했다. 나는 거실에 어울리는 테이블을 여기저기서 찾았으나 마땅한 테이블을 별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엉뚱한 용기를 내어 보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테이블을 직접 만들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꽤 긴 시간 동안 고민을 하고 디자인을 마쳤다. 공방 대표님께 도면을 보냈더니 답장이 바로 왔다. "첫 작품으로 만드시기에 디자인이 난이도가 높습니다. 간단한 형태부터 시작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도구 사용법도 같이 배워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그다음 타자는? 남편의 컴퓨터 책상이 눈이 들어왔다. 사실 그건 컴퓨터 책상이 아니라 예전에 거실에 두고 쓰던 콘솔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책상 높이보다 높다. 책상 높이가 보통 740-760mm 정도인데 저 콘솔은 높이가 860mm이다. 남편이 컴퓨터를 업으로 하다 보니 퇴근 후에도 집에서 작업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은데 거실의 콘솔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모니터를 올려놓고 사용하기 딱 좋은 사이즈라는 것이었다. 또한 윗 선반의 두께가 100mm 정도 되어서 그 아래에 키보드 트레이를 달고 사용하면 몸에 딱 맞는다며 좋아라 했다. 그렇게 몇 달째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거실에 두는 콘솔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그런지, 모양새가 영 어색하고 서재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 곁을 지나칠 때마다 불편했던 마음을 외면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나의 첫 작품으로 남편의 컴퓨터 책상을 만들기로 했다.




나의 로망, 화이트 오크


나는 다시 도면을 그렸다. 그래도 모니터를 두 개는 올려놓아야 하니 길이가 1700mm 정도는 되어야 여유가 있다. 일반 책상이 아니고 컴퓨터 책상이니 폭은 500mm 정도면 충분하고 상판 높이를 1050mm으로 하면 화면을 바라보기가 지금보다 더 편안할 것이다. 물론 남편에게 최적화된 치수이다. 상판 아래에는 선반을 하나 더 만들어 매립형 콘센트를 취부 해서 테이블 뒤 쪽으로 떨어질 각종 전원코드와 USB 잭을 연결하도록 해야겠다.


그리고는 어떤 나무를 써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화이트 오크(White Oak)로 결정했다. 내가 화이트 오크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매료된 건 꽤 오랜 전이다. 덴마크의 모던 가구 디자이너 한스 베그너(Hans J. Wegner)와 보르게 모겐센(Borge Mogensen)의 작품을 본 후였다. 미드 센트리 북유럽 디자인을 대표하는 이들 가구의 특징은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과 실용적인 편안함에 있다. 한스 베그너는 목수 아래서 견습생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무의 물성과 인간의 신체구조를 깊이 있게 이해하였다. 그는 가구의 아름다움보다 사용자의 편안함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레이 톤의 모던한 배경 속에 단정하게 놓여 있는 보르게 모겐센의 가구들, 단백한 가구의 자태를 극대화한 스타일링(출처:Carl Hansen & Søn 사의 홈페이지)

 

나는 공방 대표님께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라는 듯이 "화이트 오크"로 책상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대표님은 별다른 말씀 없이 나무를 주문해 주셨고 며칠 후에 나는 공방에서 그 나무들과 만났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북미산 오크가 꽤 좋은 품질이라고 씌어 있던 것이 생각나서 "이거 북미산인가요?”라고 잘난 척을 해보았다. 공방 대표님의 그렇다는 답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 없는 잘난 척을 마무리하였다.  나무 판재는 모두 2480mm의 길이에 폭은 150mm에서 240mm 정도 사이에 다양하게 잘려 있었다. 거친 백골의 나무들, 나는 나무를 일단 절단기 쪽으로 옮겨야 했다. 두께가 40mm 이 되는 오크 원목 판재는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다.  공방 대표님은 환하게 웃고는 있지만 나무를 다 옮기라고 하시는 모습이 왠지 냉정했다. 나무를 몇 번 들고 옮기자 손바닥에 가시가 무참히 박혔다.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짓자 대표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핀셋으로 살을 뜯어 가시을 모두 뽑았다. 이런 일쯤이야 다반사라는 몸짓이었다. 나는 더 이상의 긍휼함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고른 화이트 오크라는 녀석이 그 공방 벽면에 서 있는 모든 나무들 중에 가장 무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그 무거운 나무로 작은 소품도 아닌 컴퓨터 책상을 만들겠다고 나섰으니 그 배포는 놀랍도록 무지한 것이었다. 나는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한스 베그너와 보르게 모겐센의 우아한 가구들이 공방 천정에서 나를 비웃듯이 날아다니다 먼지를 빨아들이는 집진기 안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날 그 길고 무거운 나무들을 수압 대패 위에 올리고 내리고 다시 운반하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중간부터는 마음을 바꿨다.  고통의 순간을 역이용할 줄 아는 나의 장점을 발견한 우연의 순간이었다.

'나는 여기 운동하러 왔다'

 


백골의 화이트 오크 원목들, 다시 보니 무섭기까지 하다  ©boah
수압 대패 사용법을 알려주시는 대표님. 나이테 방향을 참고로 해서 바닥면을 결정하고 면을 고른다 ©boah




움직이는 것에는 손해가 없다.



그 날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욕조에 몸을 깊숙이 담갔다. 그렇게라도, 느닷없는 육체노동에 생고생을 한 나의 심신을 달래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지금은 생각한다. 작은 소품부터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나무를 다루는 즐거움을 더 먼저 알지 않았을까?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다가가야 하는 작업을 만만하게 본 나의 자만과 무지로 나는 며칠의 작업 후에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남편이 너는 왜 이리 사서 고생을 하냐고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나에게 그냥 사지 왜 그걸 만드느라 소란이냐고 했다. 아파도 아프다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그리 튼튼하지도 않은 체질을 무시했으니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구를 완성하기까지 가장 힘든 과정은 다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안 가본 길을 가보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세상과 만난 나는 예전의 나와는 달라져 있다. 왜냐하면 직접 걸어본 길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낭만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육체가 직접 겪는 일이다. 그 길에 부는 바람을 직접 맞는 일이고 예고치 않은 소나기를 온몸에 붓는 일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뙤약볕에서도 멈출 수 없는 걸음이며 예상치 못한 길짐승에 때문에 전력을 다하는 줄행랑이다. 아무리 낭만적으로 시작한 길도 결국은 뼈와 살에 대한 경험으로 채워진다. 운이 좋아 제대로 된 길로 들어설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 길을 되돌아 나와야 할 수도, 다른 곁길로 가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가보지도 않고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가보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헛수고는 없다. 그걸로 됐다.


길을 걸어야 나를 만날 수 있다. ©bo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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