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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Feb 02. 2021

일탈이 준 선물

3초 가방의 부활


일탈


그날은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파트너 소장님(이하 선배 언니) 집에 가서 작업을 하기로 했다. 업체들에게 요청한 견적서를 취합해서 정리하는 작업이라 노트북만 간단히 가방에 넣으면 되었다. '아차! 어제 사놓은 디퓨저도 챙겨야지'. 사실 얼마 전에 인테리어 공사를 마친 선배 언니네 집 구경을 여태 하지 못해서 겸사겸사 장소를 그쪽으로 정한 것이다. 집주인의 취향을 나름 고려해 선택한 향기를 가방에 넣으며 집을 나섰다. 아직 겨울인데 아른아른 햇살에, 봄날 소풍을 가는 것처럼 발걸음이 싱긋거렸다.


선배 언니 집에 도착해서 한바탕 집 구경을 하고 오전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나무로 만든 테이블에 앉아 맛있는 커피도 마셨다. 이미 주인에게 전해진 디퓨저의 향이 거실의 한켠을 채우고 있었지만 견적서가 도착했다는 이메일의 알림은 울리지 않았다. 중간중간 설계내용을 확인하는 전화가 계속 걸려오는 걸로 봐서는 점심시간까지도 견적서가 넘어오기는 힘들 것 같았다. 정오가 넘어가고 우리는 밥을 배달시켜 먹었다. 어차피 견적서가 있어야 문서작업을 할 수 있기에 우리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두 여자가 만났는데 뭐가 문제겠는가? 얘깃거리가 끝이 없이 이어지는 동안, 테이블에 드리워진 창틀 그림자의 움직임만이 가끔씩 시간의 흐름을 일깨워 주었다. 업무이야기에서 삼천포로 빠진 건 이미 오래전이었다. 세상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선배 언니가 불현듯 가방 하나를 가져왔다. 정말 오래된 남편의 루이뷔통 가방이었다. 그 가방에는 수작업으로 그린 패턴이 그려져 있었다.


"언니, 드디어 물감을 샀구나!"

얼마 전부터 우리는 시간 날 때, 쓰던 가방을 리폼해보자고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게 말만 하다가 몇 달이 흘러갔는데 언니가 먼저 실행에 옮긴 것이다.  단순히 선을 두 줄 그었을 뿐인데 가방은 새 생명을 얻은 듯 생기를 띄고 있었다.

 

그 날 나는 20년 전에 소위 3초 가방이라고 불리던 그 오래된 가방을 들고 갔었다. 한동안 거의 들지 않아서 수납장에 묵혀있던 그 가방이 그날따라 나를 따라온 것은, 어쩌면 오래된 가방과 인간 사이에 주어진 어떤 운명의 수레바퀴 같은 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이 아이를 어떻게 변신시킬지 궁리를 시작했다.



길을 나서면 3초에 한 번씩 나타난다고 해서 3초 가방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mground.kr/?p=12018)




모든 칠하는 공정은 서로 통한다


가방에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살펴보니 현장에서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과 너무나 유사해서 계속 웃음이 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디자인 콘셉트

나는 가방의 측면에 내 이름의 영문 이니셜을 그려 넣기로 했다. 글씨체는 가방의 로고 서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형태를 골랐다. 이니셜 "B"를 가방의 측면 하단에 그려볼 계획인데 한쪽으로 살짝 기울여 기댄 모습을 표현해 보려고 했다. 꼿꼿하게 서있지 않고 사선으로 누운 글자는 편안한 현재의 나의 마을을 나타낸다. '제 마음은 오늘 날카롭지 않아요. 거실 바닥에 몸을 뭉개고 뒹굴뒹굴할 만큼 말랑말랑, 보송보송해요'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 반대편 측면에는 그 모습을 사선으로 단순화해보면 어떨까? 나머지 여백은 가방에 이미 그려져 있는 패턴 중에서 꽃잎 모양을 골라 느낌대로 금빛으로 칠해보는 것도 좋겠다. 놀이라고 생각하니 콘셉트를 생각하는 과정이 더 재미있었다. 언제나 일탈은 즐겁다. 일을 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본의 아니게 유흥을 즐기게 되었다. 유흥에 취하니 업무 걱정은 먼지처럼 사라졌다.


밑그림

밑그림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이리저리 자유롭게 연필을 그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연필의 움직임에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려는 의도성과 느낌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표출되는 우연성이 공존한다. 선을 긋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의도했지만 막상 불편한 선들을 찾아내기도 한다. 따라서 밑그림에는 작가의 정신, 자신의 감정의 상태나 성격 또는 가치관까지도 혼재되어 표현된다. 대칭적 구조의 질서, 불규칙의 자유로움, 단순함을 통해 드러나는 순수함, 무질서 속에서 드러나는 형태의 무게감, 다채로움 속 즐거움, 정적인 선이 주는 소박함 등 자신이 담고 싶은 생각에 집중하다 보면 그것이 밑그림을 통해 나타난다. 그래서 현대 미술가들은 드로잉 자체를 완성된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가방에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공간에 벽체가 서기 전에 먹줄을 놓거나 도장할 때 밑그림을 출력해서 바탕이 되는 곳에 붙여 놓는 것과 비숫하다. 평면도에 그려진 벽체의 선만 보고도 전체적인 공간의 콘셉트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벽체 라인에 이미 설계자의 의도가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방에 내 이름의 이니셜을 그려 넣고 선을 그어나가면서 그리고 꽃잎에 적절히 채색을 더해가며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찾아나갔다. 나는 이니셜 "B"를 종이에 출력해서 가위와 칼을 이용해 여백을 잘라내었다. 그리고 가방에 대로 이리저리 붙여보며 자리를 잡아보았다. 어쩌면 이니셜의 위치를 결정하는 작업부터가 밑그림 작업의 시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글씨가 그려질 위치와 각도, 크기에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난다. 위치 결정이 끝나면 은펜으로 글씨의 외곽선을 따라 그려내면 되는데 글씨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반대편에서는 사선이라는 다른 형태로 표현되었고 그 느낌은 오히려 정리되고 정돈된 차가움이었다.  


가방에 내 이름의 이니셜을 붙이고 이리저리 자리를 잡아보았다. ©boah



전처리(pretreatment)

이미 만들어진 어떤 것을 다시 사용하거나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처리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새로 만들어져 수정될 부분이 기존의 부분과 완벽한 합체를 이루기 어렵다. 기존의 껍질을 갈아내고 깎아내어야 새로운 작업이 덧입혀지기 용이해진다. 뭔가가 새로워지는 데에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준비과정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냥 모른 척 덮어버린다고 그것이 숨겨지지 않는다. 언제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때문이다. 바꾸고 싶은 것은 과감하게 긁어내야 한다. 이 과정은 사실 매우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낡았지만 마감된 표면의 코팅면을 상하게 하는 일은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냥 쓰는 것이 맞는 건 아닌지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전처리제, 디글라이져(Deglazer)를 손에 든 순간 또 한 번의 망설임과 마주해야 한다.  

현장에서도 도장작업을 할 때 먼저 면을 고르는 작업을 통해 도장재가 잘 흡착되도록 하는 과정을 거친다. 즉 녹이나 부착물, 먼지, 기름, 뭉친 시멘트 등으로 인해 거칠고 울퉁불퉁해진 면을 고르는 일이다. 가방을 칠할 때도  전처리를 하기 위해 디글라이져라고 하는 이 뽀얀 액체를 발라주면 코팅제와 오염, 기존 색이 벗겨진다.  


베이스 페인팅(Base Painting)

다음 단계는 가방에 채색을 하기 전에 흰색 물감으로 배경을 칠해주는 과정이다. 납작붓으로 경계선 안쪽을 펴 바르듯이 발라나가면 된다. 이 과정은 도장을 할 때 흔히 말하는 퍼티(Putty) 작업과 유사하다. 도장할 면에 흰색의 폴리 우레탄계 합성수지를 미장하듯이 발라주고, 완전히 건조한 후 사포로 다시 면을 고르게 한다. 전처리로 상처 난 곳을 다시 보수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바탕면은 더욱 단단해지고 견고해진다. 새로운 작업을 받아들일 준비를 거의 다 한 셈이다. 보통 현장에서 퍼티 작업을 하면 하루 이상을 말려주어야 하지만 작은 가방 정도는 그 자리에서 바로 건조가 되었다.


칼라링(Coloring)

채색은 분위기를 표현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미 우리에게는 어떤 색을 인지할 때 느끼는 감정이 내재화되어 있어 그 편견을 깨는 것은 쉽지 않다. 가끔 아주 파격적인 색으로 기존의 선입견을 깨는 작업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 또한 그 사람의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확실한 주목을 원하는 성향인지 있는 듯 없는 듯 묻혀가는 걸 선호하는지 칼라의 선정은 분명하게 개인의 성향이 드러낸다. 평소 무난한 스타일을 선호한다고 해도 아주 작은 부분을 엣지있게 살리면 튀지 않으면서도 확실하게 존재감을 어필할 수 있다. 무미건조한 성향인 줄 알았는데 자신만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게 보인다면 얼마나 매력적인가?


가방에 색을 더하는 과정은 그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는 세필로 경계선을 살리고 납작붓으로 면을 채워나가는 것이 기본이 된다. 세필로 정교하게 경계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나는 쉽지 않았다. 그럴 때일수록 천천히 가야 한다. 세필의 경우는 여러 번 긋는 것보다 한 번을 그어도 천천히 정확히 그리는 것이 형태를 살리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조금 비뚤어져도 괜찮다. 그저 내가 의도한 것보다 선이 점점 굵어지면 좀 어떠랴. 어쩌면 그 또한 내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과정이다. 한 가지,  이 때도 현장에서 도장을 할 때처럼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칠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먼저 칠한 물감이 손에 묻어 엉뚱한 곳에 묻어나는 실수를 방지할 수 있다. 물론 밝은 색에서 어두운 색의 순서로 칠 하면 덧칠을 할 수 있어 수정이 용이하다.


바니쉬(Vanishing)

채색이 끝나고 건조가 완전히 이루어지면 바니쉬(Vanish)라는 투명 액체를 발라 표면을 반짝반짝하게 코팅해 주면 모든 과정이 끝이 난다. 드디어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는 단계다. 지금까지 작업을 단단하게 하고 빛나게 한다. 마무리의 정점을 찍는 순간이다. 이제는 활짝 웃어도 된다.


가방 채색을 위한 물감들 ©boah





재생


그 날 모든 견적서는 오후 5시가 넘어서 나의 손에 들어왔고 가방 페인팅은 7시에 끝이 났다. 그다음 날 오후에 있을 미팅을 준비하려면 나는 샛별을 보며 출근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전혀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죽어가던 생명을 살려냈기 때문이다. 나만의 색을 입혀 뭔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즐거움은 정말 독특하다. 태생과 동시에 3초 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존재했던 나의 가방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그 가방은 나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구입한 지 오래된 가방들을 사무실로 옮겨 놓았다. 아마 한 동안 나는 야근을 빙자한 유흥을 즐길 것이다. 적당한 알코올과 블루투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도 나의 벗이 되어줄 것이다. 오래된 물건을 매만져 나만의 새로운 존재로 재생시키는 일,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상상이다.


자유롭고 편안한 “B” ©boah
면을 분할하는 사선에 부드러운 황금색 꽃잎이 느낌대로! ©boah









#가방 리폼 #디자인 #디자이너 #재생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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