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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Jan 07. 2021

다 이 남자 때문이다.

 


PM 7시 30분까지 완벽했다.



"내일은 재택근무할까?"

최강 한파가 몰려온다는 뉴스로 들썩이던 오후 퇴근 무렵, 파트너 소장님이  반가운 제안을 했다. 사무실에 히터가 분명히 나오고 있는데도 한기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던 차였다. 그래 그래 내일은 더 추워진다고 하니 집에서 작업하자 마음먹었다. 다음날 아침 고구마를 깨끗이 씻어 오븐에 밀어 넣고 커피를 내렸다. 진한 커피 향기와 함께 노트북을 켜고 도면 작업을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작은 모니터를 보며 도면을 그리는 것이 영 불편했다. 견적 작업을 하려면 빨리 내용을 정리해서 기본도면 작업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더디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고구마가 꿀 떨어지게 익었다고 온 주방에 군침 나는 냄새를 피울 무렵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군고구마도 함께 차에 올랐다. 스산한 회색 겨울 날씨다. 윤종신 님의 노래에 저절로 손이갔다. 이런 날씨에 제격이다. 차 안 가득 겨울 감성을 채우고 사무실로 향했다. 역시 사무실이 좋구나. 커피를 내리고 어깨에 포근한 쇼울도 둘렀다.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최적의 컨디션이다. 오늘 할 작업은 구정이 지나자마자 시작하는 주거공간 프로젝트의 기본도면 작업이다. 클라이언트가 소장하고 계신 골동품을 공간 속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주가 되었다. 무엇보다 아주 오래된 병풍이 있었는데 그것을 새롭게 리폼할 방법을 궁리하느라 시간이 어찌 흘러갔는지 몰랐다. 집에서 싸가지고 온 군고구마는 적절히 나의 허기를 달래주었고 커피머신도 나를 위해 하루 종일 열심히 달렸다. 평면도의 개념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고 파트너 소장님과의 통화도 마쳤다. 그 무렵인가? 스마트폰 화면에 구글에서 보내는 메시지가 떴다. 6시부터 눈이 내린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때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일을 마친 나는 그동안 미뤄놓았던, 사무실 책상 앞에 붙여놓을 이미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로 공간 이미지 사진이나 가구 사진, 스케치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다 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들의 사진들에 눈길이 갔고 인물사진들을 보다가 갑자기 까뮈가 생각났다. 알베르 까뮈! 나의 최애 작가이다. 특히 그가 담배 한 대를 물고 찍은 사진은, 볼 때마다 나의 심장을 내려앉게 한다. 구글에 들어가 까뮈를 검색하고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출력했다. 왜 진작 나는 이 생각을 하지 못한 걸까? 늘 책 뒤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그 사진이, 프린트되어 내 손안에 있는 느낌은 해보지 않은 사람을 알 수 없는 감정이다. 바로 이런 걸 덕질이라고 하나보다.

'백년 전에, 알제리에서 태어나야 했어. 그랬어야 했어'

제가 일하는 책상입니다. ©boah
까뮈의 사진이 보이시나요? ©boah

그렇게 까뮈의 사진을 정리하며 좋아하는 노래를 듣다 시계를 보니 7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눈이 얼마나 왔으려나 사무실 창문을 열었다. 올해 들어 처음 보는 함박눈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고 또 한참을 보냈다. 길가에 나가보니 골목길은 눈이 한참 쌓여있었고 인적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이제는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사무실 창가에서 바라본 풍경 ©boah
사무실 현관을 나서자 소복이 쌓여있는 눈, 마냥 좋기만 했다 ©boah





PM 11시까지의 악몽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나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눈이 이렇게 많이 왔을 줄은 몰랐다. 겨우 골목길을 벗어나 대로에 접어들자 자동차 바퀴에 뽀독뽀독 소리를 내며 마치 스키장인 양 깔려있는 눈길 위에  차들이 마치 초보 스키어처럼 엉거주춤 줄지어 있었다. 나는 집 방향으로 겨우 차를 돌렸다. 앞을 바라보니 사거리 건너편 경사로에 비상등을 켜고 있는 차들이 보였다. 그 뒤로 차들이 줄지어 올라가지 못하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나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어야 했다. 차를 사무실에 두고 지하철을 타야 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나는 직진 대신 좌회전을 해서 완만한 대로로의 진입을 강행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좌회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경사로는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거북이걸음으로 움직이는 차 안에서 주변을 사진으로 남기는 여유를 부렸다. 너무 무서웠지만 어떻게든 이렇게 집으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고 차들은 엉켜있었다. 자칫하면 미끄러져 옆 차에 부딪힐 수 도 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차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런데 바로 앞의 차가 비상들을 켜고 서있다. 어찌해야 하나? 앞차의 바퀴가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조금씩 밀려 내려오는 것 같았다. 피해야 했다. 눈물이 찔끔 났다.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어 주변의 눈더미를 내 차에 다 쏟아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 핸들을 돌려 그 차 옆으로 피했다. 신기하게 나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멈춰버렸다.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차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오른쪽으로 움직여야 했다. 안 그러면 나의 옆에 있는 차가 결국 밀려서 나의 왼쪽 뒷부분과 충돌할 것 같았다. 나의 어정쩡한 위치는 내 뒤에서 따라오는 모든 차의 진행을 막고 있었다. 아마 여기가 경사로의 초입 1/4 정도 되는 지점쯤이었던 것 같다. 거기서 얼마를 버티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내 옆이 뚫려서 뒷 차들이 그쪽으로 용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서만 한 시간을 있었던 것 같다. 패닉......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회의 중이다. 나는 눈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남편은 회의 중이다. 다시 조심조심 액셀을 밟아본다. 요지부동이다. 몇십 분이 흘렀을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나의 심각한 상황을 알리 없는 남편에게 괜한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남편이 눈길 경사로에서 빠져나가는 팁을 공유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내주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서 영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겨우 정신줄을 잡았다. 요는 눈 오는 경사로에서는 어떤 버튼을 OFF 시키라는 얘기였다. 버튼을 누르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자 신기하게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 전에 택시기사님이 알려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액셀을 세게 밟지 말고 살짝살짝 밟아야 움직여요! 나는 액셀을 살짝살짝 밟아가며 영차영차를 외쳤다. 내 차는 신들린 듯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렇게 가다 보니 내 앞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내가 선두로 나섰다. 나는 이 기세로 저 언덕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잘 가고 있었고 언덕의 정상이 10-15미터 정도로 가까이 왔을 때, 차는 다시 멈췄고 바퀴는 헛돌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수 없이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경사로의 정상을 눈 앞에 두고 거기서 한 없이 액셀을 밟았다 떼기를 반복했다. 사무실에서 7시 40분에 출발했는데 그때가 10시 반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로 5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를 지나는데 3시간이 소요되었다. 나는 액셀을 밟으며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온갖 굉음을 내고 있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 기도가 절로 나왔다. 얼마 후 남자분 두 분이 와서 내 차를 뒤어서 밀어주셨다. 너무 감사했다. 나는 열심히 액셀을 밟았지만 차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다 하다 그분들도 두 손을 들었다. 나에게 언덕 위에 올라가면 길가에 차를 대고 걸어가는 게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렇게 나는 또 혼자서 아등바등거리며 한참을 보냈다. 그때 어디선가 여자분과 남자분 두 분이 나타나 내 차를 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밀어주셨던 것 같다. 차가 가까스로 움직였다. 나는 정상까지 올라왔고 길 가에 간신히 정차했다.  


사무실을 나선 후 거의 4시간 동안 눈과 사투를 벌였다.©boah





까뮈는 아니지만,


아까 어떤 남자분이 말씀하신 대로 이곳에 차를 두고 지하철로 이동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차를 몰고 경사로를 내려갈 자신도 없었다. 그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오고 있다고 했다. 안심이 되었다. 지하철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라 꽤 고생을 하며 찾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더 이상을 운전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남편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그곳에 주차를 하고 집까지 지하철로 이동을 하자고 했다. 천신만고 끝에 올라온 경사로의 정상에서 나는 다시 차를 돌려 내려와야 했다. 유턴선까지 가려고 하자 차가 움직이지 않았고 운전이 두려운 나는 차리리 밖에서 차를 밀었다. 거센 눈보라를 맞으며 차를 미는 것이 운전대를 잡는 것보다 나아 보였다. 겨우 유턴을 해서 내려가면서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내가 눈과 치열하게 싸웠던 맞은편 차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경사로에는 위로 올라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차들이 보였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그런 차를 밀고 계신 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내 차가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게 차를 밀어주신 세 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분들이 떠올랐다. 7시 40분에 사무실을 나와 11시가 다 되어야 겨우 올라갈 수 있었던 경사로를 5분 만에 내려왔다. 골목길을 다시 조심조심 지나 사무실에 차를 주차했다. 그 사이 눈은 더 내려 사무실 앞 골목길을 걸을 때마다 발은 더 깊이 빠졌다. 그래도 내 마음대로 걸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인적 없는 골목길을 지나 지하철에 도착하자 시계는 1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 왜 일찍 퇴근하지 않았냐고 남편이 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여 년 전 살다 간 어떤 남자 때문이라고, 어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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