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인문#발칸반도 #역사
몇 년 전 2017년 11월 29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 전범 재판소에서 크로아티아계 지휘관이었던 슬로보단 프랄약(Slobodan Praljak, 1945년생)은 92~95년 유고 내전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벌어진 이슬람계에 대한 학살 혐의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13년을 복역했던 슬로보단 프랄약에게 내려진 판결은 20년, 전범이나 정치인의 경우 대부분 2/3만 복역하면 석방시키는 관행으로 금방 석방이 예상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판결 이후 바로 재판정에서 누군가가 준비해준 독약을 마셨다.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이었고 대학 교수였던 그는 본인이 연출했던 연극처럼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고르바쵸프는 공산주의의 실패를 선언했고,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또한 같은 공산주의를 표방하던 발칸반도의 유고 연방에서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분리의 조짐이 보이게 된다.
인접해 있는 국가 중에서 사이가 좋은 경우는 거의 없지만 특히 발칸반도는 종교적, 민족적인 문제로 항상 위험했다. 하지만 제3세계의 선구자이자 유고연방의 종신 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의 카리스마 덕택으로 2차 대전 이후 분열을 막을 수 있었지만 1980년 그가 사망했고 연방 내의 갈등이 점점 커지고 있던 중이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발칸반도를 문화의 용광로, 문명의 경계선이라고 부른다. 서쪽으로는 로마 가톨릭, 동쪽으로는 동방정교회, 중부에는 이슬람, 남부에는 그리스 정교회가 섞여있으며, 세계적으로 한 도시에서 로마 가톨릭의 성당, 동방정교회의 교회, 이슬람의 사원, 유대교의 회당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곳은 예루살렘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정도뿐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92년부터 95년 동안에 벌어졌던 유고 내전은 현대 최악의 전쟁이었다. 1940년대에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인들을 죽이고 추방하고 개종시킨다는 1/3론 중 나치 독일마저 치를 떤 학살과 개종을 이유로 세르비아 여성들에 대한 강제 강간이, 50년 만에 유고 연방의 주축이었던 세르비아 군인들에 의해 다시 벌어졌고 전쟁 전 450만 명이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바의 인구는 전쟁 후 390만 명으로 많은 이들은 죽거나 고향을 떠난다.
유고 내전이 더더욱 그들에게 큰 아픔을 준 것은 같은 동네에서 수십 년 동안 커왔던 사람들이 민족과 종교가 다르다며, 총을 들고 서로 죽였고, 실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영화 그르바비차는 세르비아 군인에 강간당해 아이를 낳은 보스니아인 모녀에 관한 영화로 아이는 어머니에게 묻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XwgrX-fr_jc
240만명이 난민이 되었고
200만명이 자신의 집을 잃었으며
14만명이 죽었으며
2만명이 조직적으로 강간당했다.
1992-1995 유고 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