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세대 73년생의 일상
"엄마가 제일 나이 많지?"
용기 내서 나가는 독서모임인데 초등학생 딸아이가 던지는 말에 주눅이 든다. 나이로 사람 제한하는 곳도 아니고 책 읽고 얘기하러 가는 건데 우리 딸은 젊은 사람들 모이는 곳에 나이 든 사람이 왜 끼냐고 핀잔이다.
나이가 뭐 대수인가? 책 읽는 게 목적이지.
다른 목적이 있기는 하다. 일주일에 한번 각박한 나의 일상과 집안일에서 벗어나 젊음의 상징인 홍대거리를 누비는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큰 위안이 되기도 하다.
홍대근처 커피숍이 모임장소.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책 읽기 시작. 이제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번엔 어떤 책담이 될까.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 젊은 사람들이네. 요란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예쁜 20대, 30대 아가씨들. 멋지다. 부럽다.
50대가 들으면 분개하겠지만 40대면 딱 산 날과 살아갈 날의 중간이다. 어찌 생각하면 살 날이 짧을 수도 있다. 그게 슬퍼지기도 한다. 스물여덟에 첫 아이를 낳고 삼년 터울로 둘째 낳고 아이키우고 살림하느라 나에게 삼십대 초반은 빠르게 지나갔다. 좋아하던 시집과 소설책을 버리고 아이들전집으로 책장을 채워놓고 뿌듯해 했지. 내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했을까. 헌책방에도 없을 신현림 시집과 성석제님의 소설집을 그리워하고 있으면서...
책 읽는 시간이 끝나고 옹기종기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나의 양 옆에 앉은 분들은 커리어우먼. 그녀들의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책담이 나를 질리게 한다. 내가 읽은 책은 고작 한 권인데 저번달에 읽은 책도 없고 저저번달에 읽은 책도 없고 말이다.
갑자기 씁쓸해지는 대목이다.
예쁘게 잘 자라준 아이들이 있으니 위로 삼으라구요? 그래도 그녀들이 부럽다. 책에 파묻혀 지냈을 그 시간에 나는 잠 줄여가며 분유 타고 기저귀 빨고 청소하고 밥해대고 손수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다.
내 이름이 뭔지도 잊어버리고 '누구 엄마에요'라고 내가 나를 규정지었다.
잘 다듬은 손톱과 깔끔한 옷차림. 부럽다.
"얼마전에 직장 그만뒀어요. 백수에요"
"저도 지금 목까지 차 있어요"
직장 스트레스를 토로하는 그녀들. 부럽다.
고개를 떨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면바지에 하얀 치약거품 자국이 보인다.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샤워하는 딸 옆에서 양치질을 시작했다. 팔꿈치까지 치약거품이 주루륵 흘러 면바지에 묻은 모양이다. 그녀가 보았을까? 물티슈를 꺼내 얼른 닦았다.
"독립해서 혼자 살아요. 반찬도 빨래도 제가 다 해요. 별거 아닌데 힘드네요"
혼자 사는 그녀가 부럽다.
우리 집엔 아이들 책상과 옷장은 있어도 엄마의 것은 없다. 20평 아파트 방2개, 화장실 1개. 모든 건 초등학교5학년과 중학교2학년 딸을 고려해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내 방, 내 책상이 없는 우리 집. 작은 밥상 하나 펼쳐놓고 책 보다가 글쓰다가 잠들기 전에는 꼭 밥상 치워야 잘 수 있는 곳.
다음 독서모임엔 그녀들을 부러워하지 말자. 그녀들 중엔 결혼해서 예쁜 딸이 둘이나 있는 내가 부러운 사람이 있을수도 있으니까.
2015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