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다
1998년. 나는 유치원생이었다. 당시 유치원에선 남녀 할 것 없이 텔레토비 인형을 들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나도 할머니께 부탁해서 내 팔뚝만 한 인형을 샀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인형을 모아놓고 노는 게 그렇게 재밌었다. 물론 놀기만 했던 건 아니다. 한글도 공부하고 악기도 배우며 꽤나 알찬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어느새 유치원을 졸업할 때가 되었다.
졸업식 당일 아침. 겨울이었지만 날은 밝았다. 원래 있던 집단을 떠난다는 아쉬움과 새로운 일들에 대한 기대감이 섞여서 붕 뜬 기분이었다. 당시 내가 좋아했던 음료인 미에로화이바를 한 병 들이키면서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졸업식에서는 각자 공연을 하게 되어 있었다. 지금은 손이 굳었지만 그때는 피아노에 시간을 많이 투자했던 터라 나는 피아노 연주를 하기로 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라 옷도 신경 써서 입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유치원생인 내가 패션에 대해 알리 없었다. 이것저것 입어보고 엄마의 OK 싸인이 떨어지면 그걸로 만족스러웠다. 그날은 고민 끝에 검정 목티에 흰색 오리가 그려진 조끼를 입었다. 미에로화이바를 한 병 더 마시고 바로 유치원으로 향했다. 내가 그곳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다른 친구들은 오지 않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연주할 곡을 되새겨 보고 있었다.
졸업식은 모든 공연이 끝난 후 마지막엔 상장 수여식도 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정든 친구들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가족끼리 점심을 먹으러 갔다. 짜장면을 먹었다. 나는 여전히 들뜬 기분이었으나 엄마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점심을 후딱 해결하고 우리가 향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백화점은 위풍당당하게 도로변에 우뚝 서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점심을 먹은 중국집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다. 회전문을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몇 층 올라가니 반듯하고 때깔 나는 옷들이 쭉 걸려있는 상점들이 있었다.
나는 그중 처음으로 들어간 곳에서 옷을 골라한 번 입어보았다. 엄마는 처음 들어간 그 상점에서 한 번 입어본 옷을 바로 현금으로 계산했다. 얼떨떨했다. 처음 입어보는 종류의 옷이었지만 뭔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보통은 졸업식 전에 옷을 사기 마련인데 나는 왜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옷을 사게 됐을까
나는 그 이유를 커서 알게 되었다.
그날 졸업식에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남자는 정장 여자는 드레스 차림으로 왔었다. 당시의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매일 보던 친구들이 평소와 다른 옷을 입고 왔구나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엄마는 멋있고 예쁘게 입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내 차림이 좀 초라해 보였나 보다. 그 날 이렇게 입으면 되냐는 내 물음에 대한 엄마의 OK 싸인은 그저 나를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을 수도.
당시 우리 집은 백화점에서 쇼핑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1998년은 IMF였으니까. 셀 수 없이 많은 기업의 도산 그리고 대량의 실직이 일어났었고 우리도 그 폭풍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집이 경매에 부쳐지고 살던 동네를 떠나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백화점에 갔을 때 수중에 남아있던 돈이 얼마였는지는 상당히 충격이었다. 당시의 나는 반짝이는 새옷을 사서 그저 기분이 좋았던 철없는 어린아이였을 뿐 그 정장의 의미를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철없던 아이는 벌써 반 오십이 되었다. 여전히 철이 없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아이는 기죽이지 않고 최고로 키우겠다는 엄마의 마음을.
어린 시절 정장을 입고 좋아했던 기억 때문인지 커서도 옷을 살때 꼭 클래식한 걸 고르곤 한다. 첫 정장을 산 이후로는 옷을 사러 가면 정장은 아니더라도 블레이져 같은 옷을 사고 싶어했다. 다만 어린 나이에 너무 튀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다 스무살이 된 해에 정장을 새로 맞추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입기 시작했다.
맨투맨 살 돈으로 셔츠를 하나 더 사고 조금 춥더라도 패딩보다는 코트를 입는 게 좋다. 가벼운 모임에 나갈 때는 굳이 차려 입지 않아도 되지만 굳이 셔츠를 꺼내 입는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습관이 돼서 캐주얼하게 입는 법을 오히려 까먹은 것 같다.
과거의 한 점은 미래의 한 점과 연결된다고 했던가. 내가 지금 정장에 애착을 가지는 것은 어릴적에 샀던 첫 정장의 기억과 결을 같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엄마가 사준 정장을 입었지만 지금은 스스로 핏과 색상을 살펴보고 고른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비자발적 자발성이라 할 수 있다. 시작은 비자발적이었으나 어느 순간에 자발적으로 그것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이제 좀 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린 시절은 누구나 그렇듯이 비자발적으로 하는 것들이 많다. 커가면서 과도기를 거쳐 그 비자발성이 자발성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정장이 된 것이다.
정장을 입는 방법론에 대해 해박하지 못하지만 좀 더 잘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패션은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 중 하나일 테니까.
이 글을 빌려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2016.01.13
사진_글_김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