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두번째
'밥먹고 가. 난 출근해야 해서...
네 이름 전화해서 알려줘. 난 이은영이야 010-3330-0000’
은영이 누나를 떠올리면 메모를 적어놓았던 보드랍고 하얀했던 티슈가 생각난다.
삼십대 초반이었지만 아기같은 표정과 뽀얀 피부, 말캉했던 가슴을 가진 그녀.
은영이 누나를 처음 만났던 곳은 화곡동 어딘가의 버스종점 포장마차였다.
지선이가 내게 퍼부었던 말들을 떨쳐버리려 마신 술 때문에 버스정류장을 놓쳐버리고 버스기사의 호통으로 종점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버스에서 내리니 차고지 공터 앞 포장마차들이 보인다. 사람들이 꽉 차 있지는 않다. 아직 열두시 전이니 술도 깨고 요기 하고 들어가도 될 시간이다. 천막을 젖히고 들어가 보았다. 빈 자리들이 여러개 보인다. 한 테이블에선 사십대로 보이는 남자 셋이서 부어라 마셔라 술판이 한참이다. 그 옆에 자리 잡은 젊은 남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갈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다.
그들을 피해 다른 테이블을 찾다가 묘한 커플이 눈에 들어온다. 여자는 내 또래로 보이는데 남자는 오십대 중반이다. 딸과 아버지겠지. 마주 앉아서 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한손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있다. 고개를 떨군 그녀는 손을 살짝 빼서 주머니에 넣는다. 그들은 서로를 다독이는 듯했다. 연인인가? 연인이라 하기엔 나이차가 많이 난다. 불륜커플일까?
호기심에 그 커플과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우동하나 주세요.”
“술은?”
주인아주머니의 표정이 뭔가를 더 주문하길 바라는 듯했다.
“속 좀 풀고 시킬게요.”
“그려!”
아쉬운듯 한마디 던지더니 반죽을 꺼내 기계에 넣는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려했지만 묘한 커플에 자꾸 눈이 간다. 옆자리에 앉아 앞을 보고 있지만 귀는 쫑끗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
“어쩔 수 없지?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중년의 남자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또렷이 말한다.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인다. 남자인 내가 봐도 잘생겼다. 오똑한 코와 큰 눈, 언뜻 보면 장동건과 닮았다. 좀 늙고 마른 장동건. 옷도 잘 입었다. 카운테스마라 스카프다. 중소기업 사장님 쯤 될까?
크리스마스이브가 얼마 안남은 12월. 그래도 약간은 춥다. 감기기운이 있어 두꺼운 모직코트를 꺼내 입기를 잘했다. 난로 가까이 앉은 중년의 남자는 추워하지 않았지만 반대편의 그녀는 조금 떨고 있었다. 가을에 입는 긴 바바리코트의 단추를 모두 여미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그렇죠.”
남자의 질문에 한숨을 쉬며 한마디 내뱉는다.
뭐가 최선이라는 걸까? 불륜의 종지부를 찍자는 걸까? 근데 여자의 표정이 담담하다. 모든 걸 체념한듯...
“이제 들어가 보셔야죠. 사모님 전화 올거에요.”
“알았어. 아주머니 여기 얼마죠?”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뒤도 안돌아보고 계산을 하고 가버린다. 그녀 역시 나가는 중년남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멍하니 소주병만 바라보더니 빈 잔을 채운다. 힐끗힐끗 보던 나를 눈치 챈 것일까? 어색해서 아주머니를 불러본다.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안주는?”
“안주요? 음...”
멈칫하며 메뉴를 생각해본다. 메뉴판 앞쪽에 앉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낸다.
“여기 안주 많은데 같이 드실래요?”
중년의 남자가 나간 테이블 위엔 아직도 다 먹지 못한 안주가 그대로 있었다. 딹똥집, 매운닭발, 어묵탕, 노가리까지, 다 먹지도 못 할 안주를 왜 이렇게 많이 시켜 놓았을까?
약간 취기가 돈 듯 그녀의 눈빛이 풀려있다.
도둑질하다 들켜버린 사람처럼 놀란 나는 그녀가 시키는대로 하는 게 좋을 듯 했다. 못 이기는 척 일어나서 옆 테이블로 갔다. 중년의 남자가 앉았던 난로 옆 자리. 앉으려니 뭔가 불편했다. 그래서 그녀가 난로 옆에 앉기를 권했다.
“이쪽에 앉으실래요? 아까부터 보니 좀 추워하시는 것 같던데...”
다른 이의 배려가 불편한 걸까? 아니면 내가 계속 지켜봤던 걸 인정하는 꼴이 돼버린 상황이 우스웠던 걸까? 내 얼굴을 다시 훑어본다. 이내 엷은 미소가 흐른다.
“그러죠.”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색한 시선이 오고 간다. 엿듣고 엿보고 있던 게 미안해서인지 선뜻 먼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까부터 왜 나를 보고 있었어요?”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몸을 녹였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탁자위에 올린다. 빈 잔을 내게 내민다. 얼른 소주를 따라주고 병을 내려놓았다.
“우리 짠 해요.”
비슷한 또래일 거 같았지만 섣불리 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어... 네...”
우리는 동시에 잔을 비웠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먼저 중년의 남자 얘기를 시작했다.
“아까 그 분은 저희 회사 사장님이세요. 아주 고마운 분이죠.”
뭐가 고맙다는 걸까? 젊은 여자를 애인으로 둔 사장이 고마워해야하는거 아닌가.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제 형편에 갈 수도 없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보내주셨어요. 그 땐 이 회사가 잘 나갔어요. 지금은 문 닫을 상황이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사장님 회사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말을 멈추고 반쯤 남은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뭔가 하려던 말이 더 있는 듯 했지만 말을 아꼈다. 섣불리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몸이 따뜻해졌는지 그녀는 바바리코트의 깃을 풀어 헤쳤다. 여며진 코트가 풀어지고 아름다운 그녀의 목선이 보였다. 긴 생머리를 한쪽으로 정리해 빗어 넘기자 볼터치를 한 듯 붉은 뺨이 올라온다.
“몇 살이에요?”
“스물여덟이요.”
“나보다 어리네. 난 그쪽보다 네 살 더 많아요.”
“동갑 쯤으로 생각했는데...”
“그래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더니 소리내 웃는다. 웃는 모습이 귀엽다. 중년남자와 있을 때의 표정보다 밝아졌다.
“왜 혼자서 술마셔요.”
유부남에게 목매달았던 지선이. 그녀 얘기를 꺼내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 그런 나를 읽었던가?
그녀가 이차를 가자고 제안했다.
“말 하기 어려워요? 그럼 이차 가서 얘기해요.”
남자가 리드해 이차 가는 장소를 물색해야했지만 내가 사는 동네가 아니어서 그녀가 이끄는 데로 갈 수밖에 없었다. 포장마차를 나오니 밤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다시 옷깃을 여민 그녀가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우리 술 깨게 조금 걸어요. 이 동네 잘 모르죠.? 저는 이 동네 살아요. 우리 집은 여기서 쪼금만 걸어가면 돼요.”
우리는 가로등 켜진 도롯가를 걸어갔다. 그러다 작은 골목길 앞에서 멈춰선다.
“그냥 우리집에 가서 몸도 녹이고 쉬었다 갈래요?”
여자가 혼자 사는 집에 남자를 부르는 건 모든 걸 허락한다는 뜻이다. 그녀의 목선을 볼 때부터 만지고 싶었다. 하얀 목에 키스자국도 남겨주고 싶었다. 매몰찼던 지선이를 떨쳐내고도 싶었다. 오늘밤 그녀를 품고 지선이를 잊자.
화곡동 골목에 이렇게 많은 원룸이 있을 줄이야. 열 평도 안 되는 원룸들이 있는 곳. 지하철 역과 가깝고 평지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도 했다. 사장님이 넓고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집을 구해줬다며 자랑삼아 말했다. 애인이라면 아파트라도 해줬어야지 원룸이 뭐냐. 완전 짠 놈이네.
원룸 입구 엘리베이터 앞, 불이 켜지고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예뻤다. 천사같은 얼굴에 웃으니 덧니가 드러나 귀엽기까지 하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에 살짝 뽀뽀를 했다. 그녀의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키스를 퍼부어댔다. 다시 문이 열리자 그녀의 손을 잡고 짧은 복도를 걸어갔다.
집에 들어서자 가지런히 놓인 신발이 눈에 들어온다. 따뜻한 온기에 몸이 풀린 우리는 침대를 찾았다. 옷을 벗은 그녀의 몸은 하얗고 보드라웠다. 나는 본능대로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엘리베이터에서 거칠게 키스하던 그녀와 달리 몸은 점점 더 경직되어 가고 있었다. 이내 몸을 웅크리더니 부르르 떨고 있는 게 아닌가. 등을 돌린 그녀는 벗은채로 이불속에서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나의 본능은 숨어버렸고 그런 그녀가 측은해졌다.
“소리내서 울어요.”
그러자 그녀는 조금 더 소리내서 울었다.
“나 보고 울어요.”
내쪽으로 얼굴을 돌린 그녀는 손으로 가린 채 계속 울었다.
“내 품으로 들어와요.”
그녀를 꼬옥 안아줬다. 한참을 울던 그녀가 나를 쳐다본다.
"왜 혼자 술 마시고 있었어요?"
지선이 얘기를 꺼내기엔 아직 불편했지만 훌쩍이는 그녀를 달래줘야겠다 싶어 내얘기를 시작했다.
“같은 사무실 경리아가씨 였어요. 발랄하고 아주 귀여운...”
지선이는 사실 발랄하고 귀엽다기 보다는 사무실에서 자기 할 말 다하는 맹랑한 여자였다. 그런 게 끌렸던 걸까?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다. 난 그녀에게 정말 잘해줬다. 좀 신경질적이긴 했지만 여자들이 다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약속시간 보다 일찍 나가서 기다리고 먹는 것도 지선이 메뉴에 맞췄고 지선이가 보고 싶은 영화만 봤다. 그렇게 잘해줬는데 날 차버리다니...
어느날 부턴가 유부남 김과장과 외근이 잦아지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을 펑크내기 시작했다. 지선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피한다는 게 느껴질 즈음 그녀가 먼저 그만 만나자고 했다.
지선이의 신경질적인 말투가 그제서야 느껴졌다.
“이제 귀찮게 하지마!”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이유가 뭔지는 알아야 했다. 돈 좋아하고 선물 좋아하는 지선이에게 갖다 바친 명품백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그만 만나자고는 했지만 그게 아닐수도 있다. 밀당이 아닐까도 싶었다.
오전엔 티엠팀이 잡아 올 콜 상황을 지켜보다가 오후스케줄을 잡았지만 이번주는 스케줄을 잡지 않고 사무실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 사무실에서 나보다 잘난 놈은 없다. 지선이는 계속 핸드폰을 쳐다보며 카톡을 한다. 김과장도 카톡을 한다. 동시에 둘이 같이 웃는다. 뭘까?
김과장은 지선이보다 열 살이나 더 많다. 배도 나오고 머리숱도 없고 무엇보다 내 물건보다 작았다. 사우나를 같이 갔다가 아랫도리를 흘끔 보고 얼마나 헛웃음이 나오던지...
‘짧네’
김과장이 지선이를 어떻게 홀린 걸까. 좋은 남자 만났다면 쿨하게 보내주겠다만 저런 남자한테 빠진 지선이가 한심해서라도 해결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선이를 위해서...
일을 핑계로 김과장을 커피숍으로 불러냈다. 신문지에 칼을 싸들고 기다리며 어떤 말부터 꺼낼지 생각해보았다. 지선이를 어떻게 꼬신 건지도 궁금했다.
배나온 김과장이 환한 얼굴로 들어온다. 주문하라는 말에 비싼거 시켜도 되냐고 너스레를 떤다.
‘그래 마지막이니 먹고 싶은 거 다 쳐먹어라. 이 돼지같은 놈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 쯤 신문지에 싼 칼을 탁자에 올려놨다.
“이게 뭐야? 돈 들어있어?”
신문지를 풀어보던 손이 커피잔을 건드려 커피를 쏟고 만다.
“지선이는 내 여자야. 당신 부인한테 가서 다 말해도 되겠지만 그 전에 내 손에 너 죽여버릴거라고!”
“아니야. 아니야. 아무 사이도 아니야.”
김과장은 손사래를 하면서 내 눈치를 살핀다. 죽여버리겠다며 칼을 보여준 게 효과가 있었나. 김과장은 작년에 내가 친구를 때려 살인미수죄로 고소당한 사건을 알고 있다. 그래서인가 수당문제로 싸움이 붙을만하면 항상 꼬리내리고 내 의견을 잘 반영해줬다.
“둘이 사귄거야?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러면 내가 안 건드렸지.”
넙데데한 얼굴을 하고는 양목소리를 내며 아양을 떤다.
“정리할게에. 알았지이.”
헐레벌떡 일어나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계산은 내가 할게에.”
오리궁둥이를 흔들며 나가는 김과장을 보니 뿌듯했다. 이제 지선이는 고마워하며 나에게 오겠지.
그러나 다음날은 김과장과 지선이가 만나고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보다 더 어이 없었다.
“네가 아파트 한 채 해줄거야?”
아파트였다. 지선이는 나 때문에 아파트가 날아갔다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내가 사준 명품백과는 비교도 안되는 아파트.
“여자들이 모두 그런가요?”
“여자들이 모두 그렇진 않아요.”
훌쩍이던 소리가 사그러 들고 내 질문에 그녀가 대답한다.
창문사이 달빛에 비쳐진 그녀얼굴은 정말 예뻤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닦아주고 그녀의 눈을 보았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듯 꼭 안았다. 그리고 서로의 본능대로 몸을 움직였다. 이번엔 그녀의 몸이 경직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한 차례의 사정이 끝난 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웃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더 밝고 환해졌고 내 머릿속 지선이는 사라졌다.
옷을 추슬러입고 거실로 나와보았다. 작은 원룸을 주방과 방으로 분리해놓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다시 그녀가 궁금해졌다. 그녀도 나를 원했는데 왜 갑자기 몸이 경직되었는지, 사장님하곤 무슨 사이인지...
화장실에 갔다 와보니 주방에서 그녀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달걀말이다. 냉장고에서 시금치와 당근을 꺼내 다진 뒤 풀어놓은 달걀에 섞고 손놀림이 바빠졌다. 나를 위해 요리하는 그녀가 아름다웠다.
지선이는 늘 나를 혼내며 선생님처럼 꾸짖었다.
영화를 보러 갔을 때였다. 주차장에 들어서고 조수석에 앉은 그녀가 계속 잔소리다.
“운전을 어떻게 하는거야! 나 지금 화장고치는 거 안보여!”
왜 하필 꼬불꼬불한 지하주차장을 들어가는 타이밍에서 립스틱을 바르는지...
주차를 다 하자 그녀가 더더욱 화를 낸다.
“입구 앞에서 나를 내려주고 주차했어야지! 나보고 지금 저 입구까지 걸어 가라는거야! 이 뙤약볕에! 정말 미치겠다!”
그러고는 차에서 내려 씩씩대며 걸어갔다. 화는 좀 났지만 매표소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데도 보이질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다음날 출근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영화를 볼 수 있겠어! 백화점에서 쇼핑하다가 집에 갔어!”
“미안해.”
“알면 됐어!”
그런 지선이를 보다가 내 앞에서 나를 위해 즐겁게 요리하는 그녀를 보니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뒷모습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동그란 탁자위에 달걀말이 안주를 놓고 맥주를 마셨다.
이제 그녀의 얘기를 꺼낼 차례다.그녀는 달걀말이를 젓가락으로 잘라 내 한조각을 입에넣고는 씹지도 않고 멍하니 맥주잔을 노려본다.
"아까 그 분은 우리회사 사장님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후원해주신 고마운 분이죠. 학비며 생활비에 필요한 건 뭐든 다 해주셨어요. 너무 감사했는데 내가 보답할 길은 그저 학교 잘 다니고 공부 열심히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대학교 일학년 사장님이 자취방에 오셨어요. 부모님이나 다름없으니 들어오시라고 했죠. 이리저리 살펴보시다가는 저를 꼭 안아주셨어요. 얼굴을 마주 대하다가 입맞추려고 하셨어요. 제가 움찔하니까 사장님이 저보다 더 깜짝 놀라시는 거에요.
지금까지 돌봐줬는데 이런것도 못해주냐며
등을 돌리시잖아요. 오랫동안 넓은 등을 바라보다가 옷을 벗었어요. 조금 눈물도 났지만 보답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입에 넣은 달걀말이를 천천히 씹어가며 기억을 더듬어가듯 말을 꺼냈다.
"사장님이 이제 회사를 살릴 수 없을거라 하세요. 그말은 저하고의 관계도 끝이라는 거죠. 사모님이 몰라서 다행이에요."
그녀의 부모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트럭에서 과일을 팔던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나이가 많던 할머니도 일년 후 돌아가셨다. 손녀를 걱정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동사무소 직원에게 미리 부탁해서 보육원에서 살게 된 것이다.
은영이는 보육원에서 공부 잘해서 주목 받는 아이였다. 선생님들은 이런 은영이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학원도 다니지 않는 은영이가 반에서는 항상 상위권이었지만 상업계나 직업전문학교로 보내지는 게 보통의 관례였다. 은영이는 외고에 가고 싶다고 선생님께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지원해줄 수 없다는 말뿐... 보육원 규정상 지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은영이가 보육원 상담실에서 상담하는 날 밖에서 지켜보던 한 남자가 있었다. 하이테크놀러지 김지환 사장이다. 카이스트 출신으로 게임분야에서 두곽을 나타내고 있는 중소기업 대표다. 갑자기 상담실로 들어오더니 은영이를 후원하고 싶다고 한다. 삼십대초반의 젊은 사장님이 은영이의 학비를 대겠다고 나선 것이다. 은영이는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뻤다.
보육원에는 주기적으로 기업의 후원활동이 이뤄진다. 금전적으로 후원하는 경우도 있고 방문해서 빨래를 하거나 목욕봉사활동, 악기레슨 등을 하기도 한다. 하이테크놀러지는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기업이고 김사장과는 안면도 있던 터라 담당 선생님은 확인을 다시 받아내고 고맙다고 말을 건넸다. 이런 후원이 첨엔 말만 하다 흐지부지 되는 게 흔해서 은영이를 위해 다시 한번 물어봤고 흔쾌히 후원하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은영이는 그런 김지환 사장이 멋있어 보였다. 눈물나게 고마웠다. 이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선생님도 아무 걱정말고 공부하자고 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대학교에 들어가자 김지환 사장은 더 이상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내 친부모가 아닌 이상. 난 그분에게 보답해야해.’
일년 가까이 김지환 사장은 그녀의 집을 들락거렸다. 그러더니 또 이렇게도 말한다.
“너 남자 사귀고 싶으면 사귀어. 그런데 내가 원하면 언제든 나하고 해야 해. 알았지?”
그러나 그녀는 쉽사리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관계가 무르익어 스킨십이라도 할라치면 몸이 굳어진다. 모텔 방에 들어가 단 둘이 있는 순간부터 그녀는 경직된다. 그러다 도망치듯 나오기를 수십 번. 그러다 남자는 그만 만나자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엇비슷한 나이의 남자를 만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김사장이 만들어 준 보금자리에 돈은 언제든 원하는대로 주었다.
은영이는 더 이상 김사장 이외의 다른 남자를 만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김사장이 만들어준 풍요안에서 계속 살고 싶었지만 이제 그 풍요도 바닥이다. 은영이는 부끄러웠다. 김지환 사장을 떠나려고 발버둥치지도 않고 그 속에서 헤엄치고 살았던 그녀 자신이...
그녀가 나에게 하지 말았어야 할 얘기였다. 난 듣지 말았어야 했다. 지선이와 다를 게 무언가? 여자들은 다 똑같다. 돈 많은 남자들만 좋아한다. 그녀의 얘기가 계속되면서 내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 얼굴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제 얘기 불편해요?”
“아니에요. 힘들었겠어요.”
아침에 눈을 떠보니 식탁위에 밥 상이 잘 차려져 있다. 부지런도 하다. 콩나물북엇국에 콩나물무침, 김치가 올라와 있다. 분명 냉장고 속에 없던 재료들인데 말이다. 아침 일찍 집앞 슈퍼에 들러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었을 그녀를 생각하니 또 사랑스럽다. 식탁위 티슈에 써 놓은 그녀의 메모가 보인다.
‘밥 먹고 가. 난 출근해야 해서... 네 이름 전화해서 알려줘. 난 이은영이야 010-3330-0000’
그가 일어나 티슈를 들어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에 비춰본다. 볼펜으로 쓴 글씨가 더 선명해졌지만 간밤의 기억은 더 흐릿해졌다.
쓰린 속을 달래려 아직도 따끈한 콩나물국을 천천히 마셔본다. 은영이가 그를 위해 정성스레 준비한 밥상임을 그는 알고 있지만 그게 부담스러웠다.
빨리 남의 집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방안을 한번 둘러보다가
티슈를 들고 화장실로 가더니 변기에 던진다. 살랑살랑 허공을 내려와 물위에 내려앉자 이내 물 속에서 녹아내린다.
“제 이름은 종현이에요.”
그가 허공에 대고 외친 후 못본 척 방을 나선다.
종현은 그녀의 상처를 감싸고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다. 종이에 싸갔던 김과장에게 당차게 들이댔던 과도의 칼날같은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그냥 아무일 없듯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여느 연인처럼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해서 아이낳고 부부싸움도 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종현은 또 다른 자신을 보는 듯 은영이 가여웠지만 보듬어 줄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2015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