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8
여기 와서 놀란 건, 이곳 사람들의 엄청난 패션 감각이다. 케냐 중에서도 시골인 곳인데도, 몸매가 받쳐주니까 (4살배기도 이미 7등신) 뭘 입어도 태가 난다. 이분들은 웬만하면 난전에서 구제 옷을 사기 때문에 간혹 익숙한 물건들이 보인다. 한국에서 들여온 옷보따리가 들어올 때면 반가운 한글을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케냐에서는 전통의상들도 많이 눈에 띄는데 부족마다 다른 전통 의상을 입기도 한다. 역시나 젊은이들은 전통의상에도 현대 문명을 살짝 더해 준다. 카바넷은 칼렌진이라는 부족이 많이 사는데, 요즘 마사이 부족 청년들이 타운을 돌아다니며 약초물을 판다. 천을 둘러서 입는 전통 옷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비니를 쓰고, 휴대폰 집이 달린 허리띠 정도는 해줘야 최첨단 기술을 누리는 신세대라고 할 수 있지.
카바넷에서는 옷을 잘 입는 사람에게 스마트하다고 한다. 그 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케냐 온 지 일주일 만에 잔뜩 꾸미고 시내에 나갔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컨셉으로. ‘야, 이 정도면 스마트하다 완전 다 수집한다!’며 자신만만했는데, 길에 나서자마자 꿀린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닌가. 안 되겠다 싶어 급히 머리띠를 사서 착장. 하지만 그날 스마트하단 소리는 개뿔, 칭찬 한마디 듣지도 못했다. 한국에선 그렇게 튀던 표범무늬가 여기선 그저 보호색일 뿐. 어이가 없었다. 이 몸은 한때 패셔니스타였소이다. 몸빼 패션을 전 세계에 전파하던 패션의 선두주자. 파리에서 내 몸빼를 따라 입는다는 제보를 친구들이 해 올 정도로! 패션의 중심지 홍대를 다녔단 말이다. 그런데 이럴 수가!
안 되겠다, 전략을 바꾸자. 되도 안 한 외국 스타일로는 안 먹힌다. 케냐 스타일로 가자! 자신의 몸에 딱 맞는 옷을 맞춰 입는 것이 여기 마담들이 제일 즐기는 패션이다. 곧장 회 먹고 싶은 욕망을 담은 형광 물고기 아프리카 천을 발견. 현지 재봉 장인에게 투피스를 맞췄다. 천 값까지 포함한 맞춤옷이 단돈 만원. 그제야 사람들이 ‘스마트’하다고 해주는 게 아닌가! 내친김에 원피스와 자켓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드디어 나는 카바넷 패션피플로 등극하게 되었다.
어른들이 이렇게 패션감각이 있는데, 아이들이라고 어디 빠질까. 와토토의 패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주중 패션과 일요일 패션. 주중 패션의 주제는 바로 패기! 옷은 옷일 뿐! 분홍색 프릴 달린 후디도, 꽃신도 당당하게 소화해 내는 우리 머시매들! 당당히 코 밑 두줄을 선명히 그려놓은 코찔찔이들! 옷에 주먹만 한 구멍쯤은 빈티지 패션으로 승화시키는 요놈들! 카바넷 와토토 패션의 정석인 닭 모자와 코 찔찔, 그리고 쓰레빠는 필수다. 애들은 역시 꼬질꼬질해야 귀여운 듯. 우리 카바넷 애들처럼. 나이로비 애들은 너무 깔끔해서 정이 안가. 반면 일요일이 되면, 아이들은 변신을 한다. 교회를 가는 가족들은 일요일에는 아이들을 깔끔하게 입히기 때문이다. 일요일의 컨셉은 도플갱어. 남매들끼리 옷을 똑같이 입는 것을 말한다. 아, 귀여운 애 옆에 귀여운 애가 줄줄이 있잖아?
이렇게 센스쟁이들만 있는 카바넷에서 잠시 느슨해졌다가 큰코다친 적이 있다. 여기 사람들이 내가 하는 귀걸이, 옷, 신발, 팔찌 심지어 머리칼까지 다 부러워하길래 일부러 그런 부러움 살 것들은 안 하고 다닌 지 어언 육 개월. 나의 외출용 신발은 파란색 쓰레빠. 한 날은 도서관 오는 꼬꼬마들 신발을 사서들이 다 벗게 했다. 결국 한 여자애가 자기 쓰레빠를 잃어버려 엉엉 우는 것을 발견. 바로 내 신발을 벗어주고는 ‘그럼 이걸 가져라. 좋지?’했더니, 싫대. 너무도 선명한 No! 에 당황해서 다시 물어도 내 신발이 싫대. 쳇. 결국엔 내 신발을 빌려주고 내일 분토티치 아저씨 집에 니 신발 맡겨놓을 테니 찾아가라 했더니 그제사 웃음꽃이 폈다. 시장에 가서 걔 신발이랑 똑같은 걸 샀는데 내 신발보다 비싸더라. 쓰레빠에 엄지 발걸이까지 달린 고급이다. 쳇쳇. 내 쓰레빠 한 달 동안 시내 다 뒤져서 발견한 독특한 색깔에 무려 사샤 오바마 브랜드인데. 소녀에게 거절당한 것도 서러운 내 쓰레빠, 두 달 뒤 비에 젖어 말리려 내놨더니 주인집 개새끼가 물어가서 자근자근 씹다가 이 주 뒤에 돌려줬다. 아직도 개 이빨자국이 선명.
나... 너무 꼬질꼬질 한 건가?
패션 피플 (fashion people): 최신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비니 (beanie): 머리에 달라붙게 뒤집어쓰는 동그란 모자
패셔니스타 (fashionista): 뛰어난 패션 감각과 심미안으로 대중의 선망을 받으며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
투피스 (two-piece): 여성복에서, 주로 같은 천으로 하여 윗옷과 아래옷이 따로 되어 한 벌을 이룬 옷. 영어
와토토 (watoto): ‘아이들’이라는 뜻의 스와힐리어
후디 (hoodie): ‘머리 부분을 덮는 쓰개가 달린 옷’을 이르는 영어의 줄임말
도플갱어 (Doppelgänger): 누군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나 동물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독일어
사샤 오바마 (Sasha Obama):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막내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