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립일기

1화. 취향 주권을 사수하라

엄마, 제발 그 이불만은...

by 김슬

연신내역에서 오르막길 넘고 횡단보도를 건너 한참 걷다보면 등장하는 낡은 빌라. 그 빌라 2층에는 호수 판도 없는 수상한 회색 철문 하나가 있다. 장기 털리는 거 아냐? 자문하게 되는 비주얼이지만, 사실 이곳은 부동산 앱을 싹싹 뒤져 찾아낸 소중한 전셋집. 서울에 올라온 지 7년 만에 얻은 나의 첫 자취방이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기숙사와 사택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서울에서 조금이라도 싼 값에 지내기 위해 아침 체조 같은 전근대적 규율을 열심히 수행했고, 룸메이트와의 갈등 없는 생활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힘들 때마다 서울의 무서운 집세를 떠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너… 돈… 없잖아…. 그러나 영원히 ‘프로 긱사꾼’으로 살 순 없는 노릇. 상경 7년차를 한 달 앞둔 겨울, 나는 독거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다.


혼자 사는 것의 가장 큰 매력은 당연히 내 멋대로 집을 꾸밀 수 있다는 점일 테다. 컵 하나부터 매일 덮고 자는 이불까지 마음에 쏙 드는 걸로 채워 넣으리, 다짐했다. 지르고 싶은 인테리어 소품들을 잔뜩 캡처한 후, 머릿속에서 배치했다가 들어내기를 반복했다. 내 취향과 방식으로 가득 찬 나의 우주. 진정한 독립이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라 믿었다.


x8-Stylish-Studio-Apartments-to-Inspire-Your-Renovation-on-the-Interior-Collective-1.jpg.pagespeed.ic.Bzj6QfY3W0.webp 다른 거 바라는 거 없고 벽과 몰드 다 하얗고 바닥은 내추럴한 나무바닥인 그런 집 없나요. (출처: 핀터레스트)


하지만, 불길한 역접 접속사의 등장으로 눈치 챘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이삿날 오후, 딸의 첫 자취집을 시찰하기 위해 올라온 부모님은 신발을 벗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지고 볶으며 이십 몇 년을 함께 해온 2인 1조의 팀워크는 진정 눈부셨다. 엄마는 큰 방 한 쪽 벽에 행거 폴부터 세웠고, 아빠는 책상을 조립했다. 아니, 아직 거기 뭐가 들어갈지 모르는데! 거침없는 손길을 저지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내 의도와 1도 상관없이 가구 배치가 완성되었다. 고향 집에서처럼 책상과 책장이 맞물려 ‘기역’자로 놓였고, 전신 거울을 놓으려던 자리는 커다란 서랍장이 차지했다. 초등학생 때 썼던 좌식 테이블까지 등장해 정신이 더욱 혼미해졌다. 용기를 내어 창문 쪽으로 침대를 붙이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했으나…. “화장실 쪽으로 머리를 두면 안 좋다!”


생활 용품을 사러 가는 길, 집에서의 패배를 복기하며 이번만은 적극적으로 대응하리라 다짐했다. 가구 배치야 바꾸면 그만이지만 물건은 계속 남아 날 슬프게 할 테니까. 위기는 두 번 찾아왔다. 엄마가 커다란 꽃이 그려진 분홍색 극세사 이불을 카트에 집어넣은 것이다. 세트로 노란색 베개도 함께.(물론 꽃무늬.) 이 친구들이 내 침대에 깔려있을 상상을 하자 심장이 아찔하게 진자 운동을 했다. 반쯤 무릎을 꿇고 호소했다. 어머니, 분홍색 이불은 졸업하고 싶습니다. 10년 넘게 덮은 핑크색 토끼 이불 잊으셨나요? 악어의 눈물을 찔끔거린 덕에 회색 침구를 살 수 있었다. 우윳빛 커튼에 대한 로망은 아빠의 불호령으로 좌절됐다. “네가 흰색 천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 하냐?” 팩트 폭력에 머리가 멍해진 사이, 엄마가 황동색 블라인드를 날치기로 계산하려 했다.


tumblr_nw3p97ASRc1udoqv6o1_1280.jpg 안녕, 핑크겅듀 (출처: 핀터레스트)


이외에도 그릇, 수저 세트, 쓰레기 통, 욕실 슬리퍼, 발 매트 등등 취향 주권을 지키기 위한 사투는 계속됐다. 집에 돌아와 무채색 전리품들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신고식을 치른 느낌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나만의 우주를 만들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관문.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노’를 외치는 것. 까다롭게 구는 딸에게 조금 서운했을진 모르지만, 부모님도 조금쯤 깨닫지 않았을까? 품 안의 자식이 어느새 자기 세계를 꿈꾸는 어른이 됐다는 걸. 아무리 못 미덥고 마음에 안 들어도 이제는 진정 취존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다음날, 퇴근을 하고 돌아와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변기에 눈부신 레몬색 커버가 씌어져있었다. 화장실이 너무 춥다던 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두 분이 머리를 맞대고 “얘가 그나마 뭘 사야 마음에 들어 할까” 고민하는 모습이 상상돼서일까. 그 샛노란 변기 커버 만은 왠지 미워 보이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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