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보는 눈이 없어서야
잘못한 집 계약은 망한 연애와 같다. 이 사실을 깨닫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일주일. 그리고 내 고통 따위 무관하게 2년간은 절대 이 관계를 무를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약 1년이 걸렸다. 돌이켜보건대, 모든 불행의 시작은 콩깍지였다.
소개팅에서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듯 집을 볼 때도 첫인상이 8할이다. 나는 특히 화장실의 첫인상에 집착했는데, 타고난 새가슴이라 핏빛을 연상시키는 자주색 세면대나 너무 오래되어 누군가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는 타일만 봐도 심장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깨끗한 화장실이 있는 집을 부동산 사장님들은 ‘신축’이라고 불렀고, 가난한 내가 새집을 사랑한 탓에 그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하지만 상심한 여주인공 앞에 운명의 연인이 등장하는 로맨스 영화처럼 내게도 미친 듯이 끌리는 집이 나타났으니! 오래된 빌라였지만 리모델링을 해서 화장실 타일도, 벽지도 모두 새것이었다. 연쇄살인마가 시체를 처리할 것 같은 비주얼 테러에 지친 내게 순식간에 광명이 찾아왔다. 깔끔한 무채색 벽지도, 작은 방 전체를 물들이는 햇빛도 완벽했다. 창밖의 흔들리는 은행나무는 어찌나 감성적인 풍경이던지 홀린 듯 내뱉고 말았다. “계약할게요.”
물론 아주 서툴고 성급한 판단을 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위에 썼듯이 고작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겨울에 이사를 했는데 아무리 보일러 온도를 높여도 방이 냉골이었던 것이다. 수리 기사를 불렀지만, 보일러엔 이상이 없단다. 호된 감기에 걸렸고, 밥을 먹고 있으면 손가락이 얼어 뻣뻣해졌다. 내가 집 안에서 사는지 밖에서 사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틴 후, 맨발로 바닥을 집요하게 짚어본 후에야 깨달았다. 장판 밑의 보일러 선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를 기세로 듬 성 듬 성 깔려있다는 걸.
또 한 달이 지난 후엔, 침실 창문 위에서 일렬횡대로 늘어선 곰팡이들을 마주했다. 곰팡이는 여름에나 피는 건 줄 알았는데. 패닉에 빠져 그 징그러운 것들을 바라보다가 락스를 사서 돌아왔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어? 곰팡이에게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벽에 단열재 마감이 전혀 안 돼 있어서 결로 현상이 생긴 거라고 했다. 깨끗한 타일의 화장실 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번이나 부활하는 곰팡이들을 죽이고 또 죽이면서 나의 첫 집에 대한 콩깍지는 처참히 떨어져 나갔다.
소개팅 첫 만남, 잘생긴 미모에 홀딱 반해서 사귀었는데 알고 보니 정신이 썩어빠진 놈이었더라… 하는 스토리가 떠오르지 않는가. 사람 속만큼이나 집 속도 알기 어렵기에 번듯했던 첫인상을 떠올리면 울화가 치밀었다. 생김새에 눈이 멀어 다른 건 꼼꼼하게 따져볼 생각도 안 했던 내 콩깍지에 더욱. 그래도 1년이 넘어가자 약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손이 얼었어! 괜찮아, 싸잖아. 곰팡이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어! 괜찮아, 전세잖아. 마법의 주문을 외우며 부동산 앱으로 새로 올라온 매물을 스캔한다. 다행히 이 만남은 2년짜리 시한부 연애고, 나에겐 아직 가능성이 있으니까. 다음엔 좀 더 깐깐하게 찾아 헤매리라. 이별이 눈물 나게 아쉬울, 진짜 괜찮은 상상 속의 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