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꼭 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

오늘의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은 나뿐이다

by 김슬


누군가는 이 제목을 보고 오해할 수도 있으니 미리 이실직고 하겠다. 원래 일기는 내게 10만 광년 쯤 멀리 떨어진 존재였다. 일기를 써야만 했던 초딩 때는 숙제처럼 여겨져 싫었고,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어른이 된 후에는 다이어리 위에 펼쳐지는 나의 구린 글씨체와 미감을 직시하기가 힘겨워 3일 정도 끄적이다 쳐박아두기 일쑤였다.


그런 인간이 어쩌다 이런 호기로운 제목의 글을 쓰게 됐을까? 이 영광은 4년째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이제는 살짝 너덜해진 5년 다이어리에 돌려야 한다. 5년 다이어리는 기록에 일가견이 있는 선배 덕분에 알게 되었다. “슬아, 작년의 오늘 네가 숏컷을 하고 나타났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써놨네!” 가끔 선배가 전해주는 ‘작년의 오늘’ 이야기가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날짜를 몰래 바꿔치기 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똑같은 나날에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줄 것 같았다. 5년 다이어리를 샀다는 내게 선배가 당부했다. 5년 다이어리는 첫 해가 고비라고. 첫 해만 넘기면 완전 재밌어지니 포기하지 말라고.


다행히 종이 한 면에 5년치 일기를 담아야 하므로 글씨 쓰는 칸이 작았다. 처음엔 딱 한 줄만 썼다. 2023년 1월 1일의 일기. ‘아빠랑 <더글로리>를 같이 보고 있는데 갑자기 엄한 장면이 나와서 식겁했다.’ 뭔가 아쉬웠다. 말을 하다 마는 느낌이었다. 세 줄로 늘렸다. ‘친구 누구랑 어딜 가서 뭘 먹었는데 참 맛있었다’ 같은 방학 숙제 스타일의 일기가 완성됐다. 사람은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던가. 나는 일기장에 거짓을 쓰는 대신 무겁거나 우울한 감정을 털어놓지 않는 편을 택했다. 택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일기도 써 본 놈이 솔직하게 쓰는 거였다.


2년차 까지는 일기를 밀리는 날이 많았다. 소싯적 구몬 학습지 미루던 솜씨로 일주일까지도 미뤄봤다. 부덕의 소치를 인정하고 지나친 날들은 빈 칸으로 남겨두는 쿨함을 발휘하진 못했다. 캘린더 앱과 사진 앱을 켜 ‘이 날 뭐했지?’ 기억을 더듬었다. 운동도 안 하고, 아무도 안 만나고, 책도 안 읽은 날에는 회사에서 회의한 이야기를 썼다. 뭐라도 썼더니 재작년과 작년, 올해의 1월 30일은 그게 그거인 1월 30일이 아니라, 고유한 기억을 머금은 날이 되었다.


내 5년 다이어리는 만년형이라 종이 상단에 날짜가 쓰여 있고, ‘202( )‘ 칸을 연도에 맞춰 직접 채워 넣어야 한다. 2026년의 1월 1일. 제일 앞장을 펼치자 보이는 3년 간의 기록에 웅장함이 차올랐다. 늘 3일이면 패배했던 내가 3년이나 일기를 써왔다니. 이제 4년차라니! ”나 4년 째 5년 다이어리 쓰고 있어.“ 너무 멋지지 않은가? 3과 4가 주는 어감의 차이가 은근히 크다. ‘3년’은 그럴 수도 있는 느낌이지만, ‘4년’은 한층 깊이 있는 세월이 느껴진다. ‘이 사람 정말 꾸준히 뭔가를 해온 숙련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숫자란 뜻이다. 연애 기간을 부풀리는 사람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며 괄호 안에 숫자를 써넣다가 멈칫했다. 왜 5를 썼지? 6을 써야 하는데.


잠시 현실을 부정하다 위칸으로 눈을 돌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2025년 1월 1일의 나도 괄호 안에 커다랗게 4를 써놨기 때문이었다. 1월 1일뿐이 아니었다. 2일도, 3일도. 잘 못 썼다는 자각도 없이 일주일 정도 2024년을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더니. 당분간 건강할 모양이었다.


일기를 쓰기 전 항상 이전 년도의 기록을 훑어 본다. 죽지도 않고 또 오는 주제들이 있다. 2023년에 평영을 못해서 고민이던 나는 2024년에는 접영을 못해서 스트레스 받고, 2025년에는 갑자기 잘 되던 평영이 되지 않는다며 울상을 짓는다. 새로운 취미를 해보겠다고 장비를 잔뜩 사놓고 금세 질려버린 스스로에게 질려하는 패턴도 반복된다. 하지만 변한 것도 많다. 우선 코로나 확진자 동선 보고처럼 쓰던 일기에 점차 감정이 담겼다. 영원할 것 같던 취향이 달라졌고, 회사에서의 고민도 매해 진화한다. 작년에 하소연해둔 내용을 보며 ‘이런 걸로 고민했구나’ 귀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생각은 느리지만 꾸준히 변한다. 그러니까 그 순간의 내 생각에 100% 몰입하는 건 그때의 나뿐이다. 1년만 지나도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고 ‘아이구, 어렸네’ 같은 말을 던지는 게 사람이다.


최근 오래된 편지들을 정리하다 취업한 첫 해에 썼던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회사에 다니게 된 역사적인 해인 만큼 다이어리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취재 일정과 기사 기획 같은 메모들부터 스물 다섯 살의 내가 새벽 감성에 취해 써내려간 글들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보자마자 얼굴이 홧홧해졌다. 이건 당장 태워야 해. 이런 글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동시에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이런 걸 썼다고? 이런 남사스러운 글을? 일평생 담백한 사람임을 자처해온 것이 민망해졌다. 그 다이어리를 다시 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예전의 나와 비슷하고, 미래의 나 역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란 오만함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지만, 그때의 내 알맹이가 어땠는진 보여주지 않는다. 내 속을 뒤집어 까서 보여주는 건 글과 말이다. 일기 쓰기는 나의 마이크로 미시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부모님을 빼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내 인생의 사관이 되는 일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한 달이 대수랴. 텅 빈 1월의 페이지가 거슬리더라도 나머지 11개월을 채워가는 기쁨에 집중해 보면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물 다섯의 다이어리를 품기로 결정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감성을 박제한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흑역사도 역사니까.



P.S. 일기 쓰기에는 뇌과학적 효능도 있다. <멍청해지기 전에 읽는 뇌과학>이란 책에서는 뇌의 인지 기능을 잘 관리하는 방법으로 하루를 자세히 재구성해보라고 권한다. ‘상상의 범위와 품질은 경험의 범위와 품질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회상을 정확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상상도 정밀하게 할 수 있다. 쇼츠에 중독돼 썩은 뇌를 갖고 사는 현대인으로서 하루 톺아보기로 뇌를 조금이나마 회복시킬 수 있다면 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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