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풍선껌>
‘남사친 로맨스’의 핵심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오래된 남자’라는 판타지에 있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여주인공과 함께 자라서 사소하게는 그녀의 술버릇부터, 크게는 인생을 뒤흔들었던 사건 사고까지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사실 시청자가) 원하는 행동을 척척 해준다. 사람이 필요한 날엔 어깨를 내어주고, 아픈 날엔 득달같이 달려와 가족처럼 챙겨준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남자와의 연애로 멘탈이 너덜너덜해진 여주인공은 결국 귀신같이 자신의 속내를 알아주는 남사친의 품을 택한다. <풍선껌>의 행아 역시 너무나도 바쁜 석준 때문에 ‘지쳐서 미쳐서’ 이별을 결심하고 오랜 친구 리환의 손을 잡는다. 그런데 왤까. 나는 석준이 아닌, 행아가 조금 야속하게 느껴진다.
“나는 나를 다 아는 사람 말고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편했어요. 내가 진짜 씩씩하다고 오해하는 사람이나 내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사람.” 행아는 자신을 붙잡는 석준에게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은 늘 불행했노라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이제 알았다고. 맞다. 석준은 행아를 ‘오해’하고 ‘착각’했다. 그녀가 정말 구김살 없이 씩씩한 사람이라고, 혼자 둬도 외롭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것은 석준이 행아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녀가 진짜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생일을 함께 보낼 수 없어 걱정하는 그에게 그녀는 “친구들과 파티 할 거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고, 석준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행아가 혼자 생일케이크에 불을 붙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석준에게도 마찬가지로 상처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왜 말해주지 않았냐는 물음에 터져 나온 그녀의 대답이다. “선배는 내가 생일, 기념일 같은 거 안 챙기고, 아파도 엄살 안 떨고 씩씩해서 좋다니까….”
사랑받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까놓고 말해보자. 정말 그를 완벽하게 속이고 싶었던 건지. 아니다. 반쯤은 들키고 싶은 마음으로, 반쯤은 먼저 알아채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거짓말을 던진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이 속의 진실을 알아챌 수 있겠지, 판돈을 거는 마음으로. 그러나 연애란 결국 너에 대한 오해와 나에 대한 착각을 벗겨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생채기와 진통이 두려워 그대로 덮어둔다면, 그는 영원히 나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지 못할 테고 나는 끝내는 그에게 사랑받는 걸 포기하게 될 것이다. 꽁꽁 감춰놓은 속내를 알아서 헤아려주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운명이라면, 언제나 승자는 20년 넘게 서로를 속속들이 알아온 ‘남사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강석준을 응원한다. ‘몰라서’ 그녀를 외롭게 했던 그가, 알게 된 후엔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무심한 연인을 밀어내기 전에 딱 한번만 더 생각하게 되기를. 혹시 나는 힌트도 주지 않은 채 날 알아달라고 떼쓰고 있진 않았는지, 나에 대한 착각을 방치한 채 상대의 사랑을 멋대로 단정 짓진 않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