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중턱에서 스시 도시락
무리해서 결정한 여행이기는 했다.
길어진 휴직 덕분에 외벌이 생활이 길어졌고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는 극한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한 순간도 여유로운 적은 없었다.
커피 한 잔에도 망설였고, 지난 1년은 내 옷을 산 기억이 거의 없다. 여행을 결정하고 400만원이 넘는 비행기 티켓값이 할부로 착착 빠져나가면서는 더 아껴야만 했다. 숙소 결제한 것도 빠져나가고, 기차예약도 선결제다. 그렇게 한 학기를 졸라매며 살았다. 그러고 나면 여행 중에는 여유롭고 우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사실, 못 그럴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카드빚으로 시작하고 끝날 여행이다. 조금 더 여유로워도 되겠다만 우리는 천성이 못 그런 사람인가보다.
스위스 인터라켄의 융프라우호에 오르는 기차에 오르기 전 들른 곳은 근처의 마트였다. 한나절이 걸리는 긴 일정인 탓에 간식거리를 좀 준비할까 싶어 들어갔는데, 생각해보니 봉우리 어딘가에서 식사를 하려다간 그 가격이 만만치가 않겠다. 스위스의 살인적인 물가에 이미 질려버린터라 준비만이 살길이었다.
일본인들이 많이 오는지 마트에는 스시 도시락을 팔고 있었다. 닭날개 구이도 샀다. 혹시나 고산증이 오면 빠르게 당을 보충할 생각에 초컬릿도 사고 하루를 함께 해줄 물과 음료도 샀다. 스시 도시락에는 다섯 개의 스시가 들었기에 도시락을 두 개 샀는데, 그 탓일까. 이것만도 5만원이 훌쩍 넘는다. 도대체 뭘 그리 샀다고. 말이 안된다.
소중히 싸들고 알프스 봉우리가 내려다 보이는 어느 건물 뒤의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추울까 싶어 가져간 이불은 돗자리로 변신했고 우리의 점심식사는 시작되었다.
"거지가 된 것 같아"
악의없는 아이들의 말에 웃음이 났다. 큰 돈을 아꼈다는 기쁨에 만족스러워하는 나와 남편은 아이들의 표현에 웃었다. 생각해보니 길바닥에 이불 깔고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도 그러는 사람이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기분 좋아하던 나는 아이들의 색다른 시선이 재미있다.
가족과의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절대 끼니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없는 돈 쪼개가며 아끼고 또 아껴 유럽을 여행했던 어린 시절에는 하루 한 끼도 사치스러웠다. 레스토랑이라고 써 있는 곳은 들어가보지도 못했고, 저렴한 도미토리를 결정하는 기준에는 '조식포함'을 체크했었다. 조식으로 배를 넘치도록 든든하게 채운 후에는 직원의 눈치를 슬슬 보며 빵에 햄을 끼워 넣고 냅킨으로 싼 다음 가방에 집어 넣었다. 점심 도시락이었다. 그렇게 여행했었다.
사치스럽진 않지만 아이들을 꼬박꼬박 먹이고,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 잘 재워야한다는 이유로 여행이 제법 사치스러워졌다. 물론 13년전의 배낭여행에 비하면 말이다. 물과 빵 하나로 한 끼를 떼우는건 기본이었고, 남자 여행객들은 노숙도 불사했다. 하루 숙박비를 아끼면 맥도날드 햄버거를 며칠 먹을 수 있던 짠한 날들의 추억이다.
없는 살림에 준비하느라 숙소도 훌륭하지 않고, 비행기는 카타르를 경유해 만 21시간만에 유럽땅을 밟았다. 맛있는 음식이라도 여유롭게 마음껏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럼 그렇지 여기서도 계속되는 빈대가족 시리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들이 초라하거나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건 뭘 먹어도 맛있게 열심히 먹어주는 세 남자 덕분이다. 평소 집에서 맛없는 엄마밥에 단련되었던 덕분일까. 왠만하면 맛있다며 배를 채운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은 18일에 귀국인데 남편 월급일이 17일이라는 사실. 팍팍 긋고 다니는 카드값은 남편의 통장을 스쳐 유럽 곳곳의 식당과 슈퍼마켓들에 입금될 것이다. 열심히 그어놓은 카드 덕분에 여행 후유증에 시달리겠지만 일단 먹을란다. 비싸지 않아도 화려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열심히 먹고 건강하게 걸을란다.
이 놈에 여행 때문에 올해 내내 빈대가족으로 살았는데 여행 중에도 빈대가족에, 여행이 끝나도 우리는 또 몇 달간 빈대가족 예약이다.
어떤가.
모든게 행복이고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