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

침묵조차 달콤한, 그것이 가족.

by 이은경

가정이 생기고 난 후의 대부분의 여행은 가족여행이다. 쓰고 보니 매우 진부한 제목인데 막상 이것을 해보니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의미들을 찾게 된다.

결혼하여 아이가 생기고 난 후 가장 슬프고도 가장 기쁜 사실은
'주말에 누구와 무얼 하며 보내나'에 대한 고민이 필요없어졌다는 것이다.
3년 넘게 연애하던 애인이 군대에 가버리고 난 후의 주말은 끔찍했었다.

동네 오락실에 앉아 몇 시간 동안 보글보글과 테트리스를 하는게 유일한 낙이었다.

미리 약속을 잡아놓지 않으면 어느 때고 바로 만나 히히덕거릴 막역한 친구 하나

없었기에 주말이 다가오면 주말을 계획하는 것조차 내겐 일로 느껴졌다.

결혼 초에도 이런 패턴을 이어가고자 주말마다 친구들 만날 약속을 잡아보았지만

어느 틈에 조용히 와있던 뱃속의 아이 때문에 주말 내내 쇼파에 앉아 과일만 먹어댔다. 그 덕분에 25키로가 불었고

그 살이 아직도 덜 빠졌다.

두 아이가 생기고 4명의 완전체가 되고 나자 더 이상 주말을 누구와 보낼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전히 고민이 되지만, 적어도 '누구와' 함께 보낼지에 대한 고민은 사라졌다. 물을 것도 없다. 누구에게 굳이 연락하여 만남을 청하고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항상 함께 주말을 보낼 사람이 있다는게 포근하기도, 답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주말을 붙어 지내던 한 가족이

18일 내내 붙어지낸다.

항상 같은 밥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자고 같은 곳을 본다. 한국에서였다면 서로 지겹고 지겨워 벌써 싸워도 큰 싸움이 났을테지만 머나먼 땅에 서로만 의지할 상황이 되니 가족여행이 얼마나 좋은 것이고, 함께 할 가족이 있다는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알겠다.

가족여행의 다른 의미는 내가 짐을 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모든 경우에 내가 항상 모든 짐을 지고 다녔던 아가씨때의 배낭 여행과 비교하면 이건 우아함의 극치다.

모든 일정과 계획을 나에게 맡긴 후 본인의 일거리를 찾던 남편은 <짐들기>라는 종목을 발견해낸 듯했다. 과하다 싶게 모든 짐을 본인이 다 이고지고 다니려고 애를 쓴다. 하고자하는대로 두는 것이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듯 싶어 굳이 말리지 않는다. 가족여행은 참 좋은 것이다.

친구와 오랜 시간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메뉴 하나를 고를 때도, 물건을 하나 살 때도 공동경비인지 개인경비인지가 신경쓰였다. 없이 살던 시절의 여행은 모두 그랬다. 사고 싶은게 있고, 더 보고 싶은게 있고, 더 먹고 싶은게 있는데 말하기가 편치가 않다.


친구는 보기 드물게 착한 사람이었고, 나 역시 한참 착하던 시절이었음에도 스물스물 욕심이 생기고 불만이 생기고 짜증도 났다. 여행이 주는 피로와 고단함을 견디지 못한채 마음을 끝내 다스리지 못하고

하루 종일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적도 있었다. 돌아보면 이유가 뭐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소한 일이었을텐데 말이다.

가족과의 여행은 적당한 대화가 끊이지 않는 즐거움이 있다.

부부인지 불륜인지 척보면 티가 난다는데 불륜은 대화가 지나치게 많다. 같이 사는 사람끼리는 그렇게까지 할 말이 계속 많지는 않은 법인데 같이 살지 않으니 만났을 때 할 말이 많은 법이다.


가족끼리는 그렇다. 항상 종알종알 즐겁다거나 하하호호 웃음꽃이 끊이지 않는다거나 이러면 비정상이다. 필요한 말들을 언제든 편하게 나누면서도 굳이 대화가 끊이는것이 불편해 대화를 이어나가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어떤 침묵도 어색하지 않고 어떤 종알거림도 과하지 않다. 그게 가족이다. 그 가족과의 여행은 자연스럽고

생각보다 조금 더 즐겁다.

지치고 짜증나는 순간이 왜 없겠나.

까다롭게 구는 규현이 때문에, 새벽마다 날 깨워 배고프다고 하는 규민이 때문에 울컥 치고 올라오는 순간들이 자주 찾아온다.

피곤한 애들을 끌고 본인 옷을 더 구경하고 싶다며 굳이 쇼핑을 강행하는 남편에게도 한숨이 난다. 그럼에도 가족과의 여행은 사랑이라는 단단한 감정이 바탕되어 있기에 무엇보다 견고하다. 기분 상하는 일이 있다고 하루 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일정을 변경하여 각자 다니기로 한다거나 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들과의 여행은 그 자체가 감사다.

콧물이 좀 나더니 쏘옥 들어가버린게 감사이고, 다른 사람이 두고 간 건줄도 모르고 테이블 위의 물을 벌컥 들이마셨는데 별 탈 없이 지나간게 감사이고, 이만큼 돌아다니는데 아프지 않고 건강하니 그저 감사이다. 아빠엄마를 돕겠다고 미리 문을 열어놓고 기다려준다거나 배낭을 하나씩 매고 앞장서 걸어주기까지 하면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처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집에 있을 때는 남편이 매일같이 직장에 나가 일하고 돈벌어오는게 너무도 당연했고, 아침이면 책가방을 메고 나간 후에 학원 순회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 아이들의 모습도 당연하기만 했다.


조금 더 월급이 많지 않음과

조금 더 열심히 영어책을 읽지 않음이

불만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먼 곳에서 넷이 한 몸처럼 다니다보니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게 행복이고 감사다.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 붙어다니는건 처음인데 그 시간을 탈없이 싸움없이 눈물없이 보내고 있다는게

그게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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