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해야되니 꾀좀 부려도 될까요
여행을 하자니 숙제가 문제다.
유난히 짧은 방학인데, 방학 내내 집을 떠나 있자니 숙제가 걸린다. 확 그냥 다 재낄까. 도 생각했었지만 그건 또 교육적이지 않은 듯하다. 내가 비록 인생은 그다지 모범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지만 아이들만큼은 제대로 교육시켜야한다고 외치는 사람인지라 방학숙제를 재끼는 건 용납이 안된다.
대신, 꾀를 썼다.
우리 어릴 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탐구생활> 한 권이면 방학숙제가 끝이었던 것, 기억할런지. 그거 한 권 잘 해가면 되는거였고, 그거 한 권 안해가면 죽는거였다.
세월이 많이 변해 숙제가 달라졌다. 자기가 하고 싶은 숙제를 자기가 정하는 혁명적인 시대가 왔다. 요즘 아이들은 탐구생활의 늪에 빠져볼 일이 없어 부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어떤 방학에는 방학식한지 이틀만에 모두 끝낸 적도 있고, 어떤 방학에는 개학날 아침까지 해도 빈 칸이 텅텅 남았다. 대부분 숙제들이 그렇지만 탐구생활이야말로 잘 하려면 얼마든지 더 잘 할 수도 있고, 대충 하려면 반나절도 안 걸릴 정도로 편차가 컸다.
하루이틀 걸려서는 도저히 되지 않는 '장기프로젝트'라는 방학숙제를 받아왔다. 3학년 큰놈이. 방학 기간 전체를 통해 이루어야하는 목표와 결과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차라리 탐구생활이 나은 듯도 하다. 형식적으로 아이와 상의를 통하긴 했지만 사실 엄마 맘대로 밀어붙여 프로젝트 과제를 선정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쓰기>
<매일 근력운동하여 체력향상시키기>
방학 기간 전체 동안 3개국 6개 도시를 돌아다니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 매일 피곤한 일정 중에 무리가 가지 않아야 하며 너무 쉽거나 빨리 끝나버려서 뭔가 엄마 마음에 아쉬움을 주거나 숙제를 우습게 보는 일을 막아보기 위한 꾀를 쓴거다. 난이도 조절에 고심했었다.
아이들은 힘들어했다.
평소에 일주일에 두 편 정도의 일기만 쓰던 아이들이고, 남자 아이들은(아니, 남자 어른들도) 글쓰기를 질색한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쏘다니며 사진 찍고 구경하고 기다리고 줄서고 입에 안 맞는 음식 먹어가며 지친 몸으로 숙소에 돌아오는데 일기쓰기라는 돌덩이가 기다린다.
처음엔 나도 융통성이 없었다. 힘들어 눈이 감기는 아이들에게 그래도 무조건 쓰라고 했다. 아직은 엄마 말을 순순히 듣는 아이들인지라 쓰기는 했다. 다크써클이 내려오고 코피가 흐르기도 했다. 글씨는 엉망이고 내용에 영혼이 전혀 없다.
엄마는 다시 꾀를 쓴다.
"숙소에 돌아오면 씻고 바로 자는걸로 하자. 대신 아침에 늦잠을 충분히 자고 아침마다 전날의 일들을 일기에 쓰기로!"
아이들도 순순히 응한다. 해보니까 아침에는 컨디션이 좀 더 나은가보다.
그리하여 일기 매일쓰기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성공적이다. 처음 며칠은 쓸 게 없다는 둥 오늘 어디 다녀왔었는지 다시 말해달라는 둥 다섯줄만 쓰면 안되냐는 둥 군소리가 많더니 고 며칠이 무섭다. 아침을 먹고 나면 어느새 둘이 앉아 일기를 쓴다. 글씨가 예뻐지고 내용이 많아진 것도 물론이다.
아이들과의 여행을 계획하면서 거창한 목표는 없었다. 무언가를 더 많이 알게 되거나 시야가 화악 트이거나 영어가 유창해지거나 하는 바램도 없었다. 그냥 무탈하게 다른 세상 사는 사람들 구경하고 돌아오면 그만이지 했다. 나도 잘 모르는데 얘들이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 양식에 어찌 관심이 생길 것이며, 노틀담의 꼽추는 나도 아직 안 읽은 책인데 그 배경이 된 성당에서 무슨 감동을 받을 수 있겠는가. 배경 지식을 좀 더 쌓아왔더라면 조금 더 알찼을까. 그게 더 많이 우리 여행을 풍족하게 했을까. 모를 일이다.
기대없이 바램없이 왔는데 두툼하고 나달거리는 일기장 한 권씩은 남겨간다. 방학 숙제 장기프로젝트용으로 제법 괜찮아보이며, 몇 달 후, 몇 년 후 돌아보며 추억할 기록 한 가지는 건졌으니 뿌듯해진다.
초등3학년때부터의 일기장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도저히 일기 쓰기를 힘들어하는 반 아이들을 보여줄 때도 있었고 규현이와 함께 읽으며 깔깔거리기도 했다. 언젠가는 규현이도 이 일기장을 들춰보며 마치 그 때의 모든 여행이 생생히 기억나는 척할 날이 오겠지!
나, 한 가지만 더 바래도 될까.
이왕 이렇게 매일 일기쓰는 습관이 잡힌 김에 집에 돌아가서도 매일매일 일기쓰는 새나라의 어린이들이 되어주면 안될까.
그렇게 해서 잘 다져진 글쓰기 실력으로 대학 좀 수월하게 입학하면 안될까.
욕심이 끝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