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통금시간 저녁9시

by 이은경


가족여행이라고 야심차게 출발했으니 잠시도 혼자만의 시간이 없는게 못내 아쉽다. 욕심이 과한걸까.

그래도 잠시 좀 혼자 있고 싶어졌다.


곤한 하루 일정을 마치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 아이들을 씻기고 일기 쓰는 것도 봐주고 짐도 정리해두었다. 다들 피곤한지 침대에 꼭 붙어 누워있다. 피곤할 만도 하지.


처음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시도했다. 사실, 유럽 그 넓은 땅 곳곳마다 홀로 여행하는 한국의 젊은 처자들이 없는 곳이 없다. 얼마나 당차고 씩씩한지 예쁘고 자랑스럽다. 그들은 며칠, 몇 주를 그리 혼자 다니는데, 죽자고 붙어다닌 가족여행의 후유증일까, 혼자 나서려는데 겁이 덜컥 났다.


소매치기와 집시가 유명한 이탈리아라 더 그랬나보다. 남편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안 나가면 안 되겠냐 하지만 안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혼자 발길 닿는대로 걸으며 보고싶은거 실컷 좀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배낭을 앞으로 안고 걸으라는 남편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듣고 길을 나섰다.

아. 상쾌한 이 기분이라니.

몇 분이나 더 걸어야 목적지에 도착하는지 설명해줘야할 필요도 없고, 아이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고, 아이의 손을 잡을 필요도 없다. 툭하면 멈춰 서서 물을 먹일 필요도 없고, '저게 두오모야'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과 함께일 때 할 수 없는 걸 하기로 했다. 짜잔. 눈 앞에 보이는 화장품 가게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이탈리아의 미샤라고 불리는 'KIKO'매장이었다. 대단한 볼거리는 없었지만 이탈리아의 화장품을 얼굴 여기저기 찍어바르는 동안 느낀 해방감과 자유로움은 그간 여행이 준 무게와 부담을 확 덜어주었다. 혼자 멋부리며 여행하는 아가씨처럼 오랫만에 마스카라로 눈썹을 세우고, 새빨강 립스틱도 발랐다.


기분이 좋아 별것도 아닌 곳에서 셀카를 막 찍어대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갑자기 자유부인이 되고 보니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래서 자유가 중요한 거다. 멀쩡한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버린다.


혼자 걷는 외국의 낯설고 멋진 거리는 없던 감성도 최대한 끌어내준다. 많이 고맙다. 글로 옮기고 싶은 얘기들이 이곳저곳에서 마구 떠올랐고, 글로 옮길 생각에 더 신이 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아가씨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지나가는 이태리 남자들에게 눈길을 한 번씩 더 주는 인심도 생겼고 말이다. 자유는 여유를 준다. 길가는 어린 아이들을 향해 웃어보이기도 하고, 캐리어를 끌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먼저 나서 길을 비켜 주었다.

가족과 함께 다닐 때는 그럴 여유가 없었던 걸 혼자 있어보니 알게 된다.



아쉽게도 통금 시간은 9시.

남편은 말이 없었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8시 45분쯤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어디고~?'


어디긴 어디냐. 이탈리아다. 피렌체다. 그 중에서도 화장품 가게다. 됐냐.


걱정해서 연락했나보다.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어 고맙기보다는 끝나가는 시간이 마냥 아쉽기만 했다.


그렇게 3.95유로짜리 립스틱을 하나 사들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썩 괜찮다. 오랫만의 자유로운 공기도 괜찮고, 꼭 하나 사고 싶었던 KIKO 립스틱도 마음에 쏙이다. 그렇게도 걷고 싶었던 거리들을 이곳저곳 쑤시고 걸었더니 허리가 뻐근해온다.


숙소 문을 열자 아이들이 환호를 지른다. 그래, 나에겐 이렇게 든든한 가족이 있었지. 혼자가 아니었지. 혼자라서 좋았지만, 혼자였다면 정말 외로웠을거야.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참 좋은 거구나.


그렇게 잠시의 자유시간이 끝났고 우리의 신데렐라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맹렬하게 아이들에게 양치질을 시키고 빨리 자라고 소리 지르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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