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ARA라 쓰고 쇼핑중독이라 읽는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다.
보기 드물게 가정적인 편이며 아이들 교육과 건강에 유난한 관심을 보이는 열혈 아빠다. 늘 아내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퍼부어주고, 왠만한 주부와 엄마의 역할들도 소리없이 슥슥 해내는 사람이다.
눈치챘을 수도 있겠다.
뜬금없는 남편 자랑과 칭찬은 이유가 있다. 오늘은 남편 뒷담화 좀 해야겠다.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는건데,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며 쓰도록 노력은 하겠다.
객관적이지 못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노력은 하겠다.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건 어쩔 수 없는거다.
남편은 쇼핑을 좋아한다.
남편은 쇼핑을 정말 좋아한다.
178cm의 키에 적당한 체격과 흰 피부, 선한 인상을 지녔으며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도 적당한 편이다. 일단 옷걸이가 그럭저럭 괜찮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도 나이 대비, 애둘아빠 대비 괜찮다는 것이니 적당히 상상해주시라. 왠만하면 그럭저럭 옷발이 잘 받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문제는 더 다양하고 더 특이하고 더 많은 옷을 향한 갈증이 심하다는 것이다.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은 함께 두 아들들을 키우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이 기질들이 오늘날 꼼꼼하고 차분하게 본인의 옷을 고르는 일에 다시 한 번 발휘될 줄은 정말 몰랐다. 전쟁같았던 육아를 겪어낼 때는 정말 몰랐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멋부리고 쇼핑하기를 좋아하는 줄은.
중독은 좀 심했다고 치자. 그래도 분명한 건 왠만한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보다도 쇼핑을 좋아하고 틈만 나면 쇼핑을 나서려고 애를 쓴다는 거다.
유럽에 가면 옷값이 한국보다 싼 편이며 마침 여름 대세일 시즌일거라는 예상을 하며 가서 옷을 사입기로 했다. 그래서 정말 티 두 장, 바지 두 개 정도만 챙겨서 출발했다. 출발하는 캐리어에는 라면과 햇반이 가득했으므로 옷을 많이 챙기고 싶어도 할 수 없기는 했다.
그.런.데.
쇼핑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일단, 가격은 만만했다. 우리가 들른 곳은
ZARA, H&M 같은 저렴하고 트렌디한 옷매장이었는데 예상대로 여름 마감세일 중이라 티셔츠 한 장에 10유로(14,000원) 정도면 건질만한 것들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만만치 않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이들은 쇼핑을 싫어한다. 정말로 싫어한다.
생각해보니 아이들은 한국에서도 쇼핑을 싫어했었다. 남편옷 사러 나설 때면 아이들은 절레절레 집에 남겠다고 했었다. 두세시간 정도는 둘이 잘 있기도 하니, 얼른 가서 둘러보고 왔었다. 그런데 여기 오니 사정이 다르다. 매장마다 잘나가는 최신 유행 티셔츠와 바지들이 그득했지만 우리에게는 시차와 피로에 지친 두 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 같으면 근처 맥도날드 매장 같은 곳에서 간식을 먹으며 기다리게도 하겠다만 온갖 인종들이 뒤섞여 우리끼리도 손 꼭 잡고 다녀야 하는 먼 땅에서 아이들끼리만 둘 곳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샵 한 군데 들어가면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들이 앉아서 기다릴 곳을 찾았고, 기다리다 지루해져 오만 발차기와 돌려차기를 하기 전에 매장을 발빠르게 둘러봐야하는 우리는 마음이 항상 급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맥플러리를 사주겠노라 약속을 하고 달래가며 간신히 간신히 티셔츠 몇 장을 건졌다. 남편이 원하던 완전 잘나가는 파리지앵, 유럽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일단 티셔츠 두 장으로 돌려입는 일은 막았다. 급한 불만 껐다.
그러고는 또 궁시렁거린다. (이 궁시렁이 중독자임을 알 수 있는 증거다. )
맘씨 좋은 주인 할아버지가 항상 잘 지켜주고 있는 숙소 덕분에 아이들만 두고 둘이 나섰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발걸음이 엄청 급하다. 눈에 띄는 남자옷 매장에 들어가 손이 안 보이게 옷들을 골라냈고 다행히 티셔츠 세 장이 맘에 들었다. (세 장이 맘에 들기 위해서는 열두장 정도를 입어보면 된다. 대단하다. 정말.)
깔끔하고 시원해보이는 티셔츠를 간신히 골랐는데, 계산을 하다가 웃음이 터졌다.
한 장이 아니고 두 장도 아니고 세 장이나 샀는데 가격이 14유로다. (한국돈으로 2만원쯤 되려나)
싸게 사서 싱글벙글하는 나와, 너무 싼 옷을 신나서 좋다고 골라놓고 허무해하는 남편. 동대문 시장 보세 도매옷값보다도 싼 이탈리아의 옷값에 그저 웃음이 났다 이렇게 싼 옷이 너무 잘 어울린다는 사실에 더 기분이 나쁘다며 따라 웃는다.
쇼핑중독자와의 여행은 실은 많이 귀찮다. 꼭 봐야하는 도시의 건축물, 성당, 박물관들 말고도 옷매장과 신발매장 일정까지 포함한다는 뜻이다. 질색하는 아이들을 달래는 일까지 해가며 말이다. 싫은 티를 내며 툴툴거려보지만 그런 나를 구슬려 또 쇼핑일정을 기어이 잡아내는 사람이다. 못이긴척 또 따라가 매의 눈으로 예쁜 티셔츠를 기어이 골라내는 아내다. 나는.
첨부할 사진은 세 장에 이만원짜리 티셔츠들이다. 이 세 장에 이만원이다. 킥킥.
남편이 옷 입으러 들어간 사이
남자옷 코너에서 가장 작은 사이즈로 나도 슬쩍 하나 골랐다. 내 옷은 4천원.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