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놀이

열심히 쓴다고 썼습니다

by 이은경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못한건지 안한건지 좀처럼 자판 두드리기가 영 내키지 않았다. 내키지 않는다고 안쓰는 사람은 작가가 아닌데. 아직 멀었다.

진정한 작가라면,

내키든 아니든 잘써지든 못써지든

주구장창 자판을 두드렸어야 맞다.


용기를 낸건 뜻밖에도 고된 여행 덕분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덜컹이는 기차에서 눈을 부릅뜨며 짐을 지키면서, 숙소에서 아이들을 챙기는 분주한 아침 시간에도..

나를 위로하고 북돋아준건 뜻밖에도 잠깐씩 적어내려가는 글이었다.


글쓰기라면 우리집의 책상이나 식탁 위에서 온 정성을 다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아이들 장난감으로나 쓸 요량으로 챙겼던 휴대용 키보드가 이번 여행 최고의 파트너가 될 줄이야.


처음 하루이틀은 그냥 썼다.

보이는 걸 쓰기도 하고, 안 보이는 걸 쓰기도 했다. 어떤 것도 염두에 두지 않고 바보처럼 생각없이 그냥 썼다. 쓰다보니 생각이 생겨났고 느낌이 생생해졌고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이들이 샤워하는 10분 동안 한 편의 글을 완성해버리기도 했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다. 남편과 아이들이 곤히 자는 아침 시간, 괜히 키보드 소리가 신경쓰여 살금살금 숙소 로비에 내려가 또 타닥타닥. 이런 키보드를 본 적 없었던게 분명한 단체 관광객 무리가 모두 한 번씩 내 앞에 머물러 구경을 했다. 그들이 읽을 수 없는 문자를 한 바탕 써내려가는 괜히 고소한 기분에 글쓰는 내내 들뜨기도 했다.


그렇게 쓴 글들을 이 곳에 올렸다.

누가 왜 읽는지 모르겠지만 하루에도 수십명이 글을 보고 갔다고 알려준다. 신기했다. 급하게 써서 올리느라 맞춤법, 띄어쓰기도 말썽인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들이 있다는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이라도 퇴고하고 올릴 걸,

미안해졌다.


글쓰기가 탄력이 붙자 머릿속이 온통 글감찾기에 나섰다. 독특한 음식을 접할 때나, 아이들과의 재미있었던 일, 말못하게 멋진 건축물 앞에서도 글쓰기 생각이 났다. 이 장면을, 이 모습을,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더 생생하게 즐겁게 읽고싶게 옮길 수 있을까. 어떤 사진과 함께해야 풍미가 더해질까.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어린 것들과의 긴 여행이었지만 수시로 떠오르는 글감과 스마트폰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사진들 덕분에 마음만은 이미 작가가 되어버렸다.


이 글들이 모여 한 권의 책으로 엮여지는 상상을 하며 행복했고, 안타깝게도 출판사의 거절 메일이 메일함에 하나씩 수북히 쌓여가는 모습도 그려졌다.

(한 권의 책을 내봤고, 두 번의 거절을 겪어봤다. 출간의 기쁨도 겪어봤지만, 열심히 쓴 원고가 컴퓨터에 잠자고만 있는걸 애써 모른척하며 지내고 있다는 뜻이다.)


요런 편집은 어떨까 좀 특이한 제본이나 판형은 어떨까 당연히 컬러 인쇄를 원하지만 출판사에서 안된다하면 어쩌지. 뭉게뭉게 상상만으로 글들은 한권의 어엿한 책이 되고 나는 여행작가가 된다.


두 번의 쓴 맛으로 잘 알고 있다.

이 정도 글은 절대 책이 될 수 없다는걸.

조금 더 여물어지고, 진하게 익고, 매끄럽게 다듬어지고, 조로록 흘러내릴만큼 풍성해져야 한다는걸.


아니까 더 부끄럽고

아니까 힘이 빠지는게 사실.


어쩌겠나.

내가 아직 여기인걸.

올라갈 곳이 많은걸.


수줍게 썼고,

곧장 지워버리고 싶게 서툴다.


그래도 이 놀이를 계속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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