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로 스트레스를 덮어버리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의 대략 2주간
나는 스트레스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복직이 코앞에 달려오고 있었고, 큰아이는 잘 다니던 학원을 이제 그만두고 싶다며 징징거렸고, 3년간 잘 알고 지내던 가깝던 언니에 단단히 삐쳐서 마음을 결국 닫았다.
작은 아이는 수업 시간에 너무 집중을 못한다며 가정에서 조금 더 신경써야할 거 같다는 담임 선생님의 경고를 받았고, 부실하게 준비중이던 긴 여행은 출발 날짜가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결제해놓은 각종 숙소 대금들이 빠져나가버리자 통장은 텅텅 비다 못해 카드대금 입금하라는 전화에 시달리게 했고, 마지막 비상금인 친구들과의 여행곗돈을 끌어다 쓰는 것으로 간신히 카드값 독촉 전화를 중단시킬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과 상황이 내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원래 스트레스에 약한 사람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받을 만도 하지 않은가.
한마디로
우울했다.
하나도 신이 나지 않았다.
즐거우려고 행복하려고 계획한 여행이었는데 여행마저 짐스러웠다. 여행준비가 스트레스였다. 훌쩍 떠날 수 있었던 아가씨 시절에도 여행준비는 녹록치 않았는데, 아이들 학원에 일일이 연락을 드려 사정을 말씀드리고 여행 후에 뵙겠다고 인사드리는 것도 중요한 할 일이었다. (결국은 방과후 컴퓨터 선생님을 빼먹었다.)
이런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야한다는게 더 우울했다.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가야하는건가 몇 번을 다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상황이라면 나는 이번 방학 동안 알뜰히 삼시세끼 집밥을 해먹으며 식비를 줄이고, 학원에 지친 큰아이가 좀 쉬며 충전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작은아이가 못다 외운 구구단을 완성할 수 있게 엄마표 공부 시간을 늘려야만 했다. 대면대면해진 그 언니와는 맥주 한 잔을 사이에 놓고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대화를 시도했어야 하며, 다가오는 복직을 대비해 운동으로 체력도 다지고 다이어트를 겸했어야 맞다.
여행에 적당한 때가 과연 있는걸까.
언제가 일상을 멈추고 여행지로 떠나기 가장 적당한 때일까.
그렇게 복잡한 몸과 마음으로 날짜에 떠밀리듯 마치 누가 다녀오라고 시킨 것처럼 무겁게 시작한 여행이었다. 나는 이륙하는 비행기에서 어서 이 여행이 끝나기를 바랬다. 여행이 주는 설렘과 기대, 공항 수속을 밟을 때의 상쾌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행의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나흘..
생각보다 여행이 힘들었다. 숙소는 맘에 들지 않았고, 큰아이는 비행기에서 토를 하더니 파리에서는 연신 코피를 쏟았다. 작은아이는 틱이 더 심해진 것 같았고, 남편은 에어컨이 없는 숙소와 처음 겪는 유럽의 낯선 문화에 힘들어했다. 식당에서 해결하는 한 끼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비도 왔고, 덥기도 했다. 물가는 예상보다 비쌌고, 하루 예산은 날마다 초과되었다.
머릿속으로 몇달간 그려왔던 행복한 그림같은 여행은 그 곳에 없었다. 여행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빵과 샌드위치가 지겨워지고 영어도 잘 안 통하는 낯선 이 도시가 힘들게 느껴졌다.
신기한 일은 그 때 일어났다.
오늘의 한끼를 해결할 마땅한 식당을 찾는 동안, 뜨거운 햇살을 피해 아이들 선글라스를 구입하는 동안, 숙소의 선풍기 앞에서 더위를 참는 동안.
그 시간 동안. 그 고민 덕분에.
한국에서 나를 못살게 굴던 종합 고민세트들이 잊혀져 버린 것이다.
복직은 까짓거 출근 후에 걱정하기로 했고, 큰아이가 가기 싫다던 중국어 학원은 일단 좀 쉬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작은아이는 여행의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틱이 줄어들고 있었다. 돌아가면 나는 또 카드 회사와 많은 통화를 하게 되겠지만 그 또한 별일 아닌 것으로 느껴졌다.
나를 서운하게 만들었던 그 언니를 그냥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며, 구구단 좀 늦게 외우는건 아이 인생에 하나도 중요한게 아니야라는 마음도 들었다. 노력한 적은 없었다. 애써 좋게 생각하려 애쓰지 않았다.
매일 별일없이 먹고 여행하는 것이 목표인 하루하루들이 반복되니, 매일 목표달성하는 새로운 즐거움들이 달콤했다. 비싼 돈내고 입에 안 맞는 음식들을 매끼 먹어대려니 끼니 때마다 스트레스였는데 그 스트레스가 다른 모든 고민들을 이겨버렸다. 소매치기가 극성이라는 이탈리아에서 거리를 걷는것 자체가 주는 불안함과 스트레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털리지 않았다는 기쁨과 안도가 한국에서 끌어안고 있었던 복잡한 마음들을 일순간에 정리시켜 주었다.
스트레스는 또다른 스트레스로 덮어버릴 수 있다는걸 알았다. 여행이 주는 뜻밖의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