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화가

가이드 언니를 통한 천재화가와의 만남

by 이은경



천재화가를 만났다.

직접 만난건 아니었다. 소개를 받았다.

그다지 궁금한 적 없었는데 막상 소개를 받고 보니 고개가 끄덕끄덕 그가 좋아졌다.

이래서 선자리에 나갈 땐 주선자의 역할이 지대하다는건가보다.


바티칸 박물관으로의 반일 투어를 신청했다. 일일 아니고 반일이라니. 하루의 반나절 정도밖에 일정만 간신히 소화해내던 우리의 꼬맹이들은 반일 투어라니 대환영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반일인것이다.


바티칸 반일 투어 일정을 계획하면서도, 여행을 마치는 마지막날이라는 분주함을 탓하며 바티칸 박물관에 대해 무지했었다. 몇 장 읽어보고 올 것을 하는 후회는 항상 그 곳에 도착하면 밀려오게 마련이다. 다행이고 믿을 만한 구석이었던 것은 사전지불했던 투어 가이드 비용 뿐이었다.


이 비용 덕분에 그 날 그 곳에서 잊지 못할 천재화가와의 만남을 경험했다.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 위인전집의 60분의 위인 중 한 명이었다. 그 위인전집을 한 권당 최소한 20번씩 닳도록 읽었던 나였기에 그 책의 주요 에피소드들은 훤히 기억이 났다. 미술과 예술 작품에 도통 무관심인 사람이라 60명의 위인들 중에서도 후순위인 편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책 속의 삽화가 아직도 또렷하다. 그랬던 그였는데, 화가라면 백만가지 직업 중 마지막으로 관심을 보이는 나였는데 가이드 언니의 설명에 마음을 뺐겼다.



우린 이렇게 작은 뜰에 모여 앉아 언니의 설명을 들었다. 언니는 20대 후반쯤 되어보였는데 타고난 입담과 재치가 있는 분이었다. 개그우먼 신봉선을 닮은 것 같다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언니는 가방 속에서 너덜거리는 각종 사진과 자료들을 꺼내 일일이 한 명씩 눈 앞에 갖다 대어주었고, 최신 문물인 화면이 큼직한 아이패드에서 선명한 자료 사진들을 바로바로 터치해내었다.

중매쟁이가 신랑 쪽 집문서를 꺼내고 땅문서를 꺼내들며 신부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신부의 마음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천재화가 미켈란젤로에 관한 수없는 일화들이 있지만 오늘 들은 것 중 몇 가지가 마음에 쏘옥 들어와버렸다.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에서 지금 만큼의 감동을 받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그 때 난 그만큼의 시간을 견딘 적이 없었다. 원하든 아니든 타고난 재능 때문에 박수를 받아본 경험도, 나의 재능 탓에 원치 않는 작업을 해야하는 경험도, 싫은 일을 하루 종일 꾸역꾸역 해야만 하는 상황도.. 어떤 것도 경험해보지 않은 초등학생에게 미켈란젤로는 이해되지 않는 미치광이 화가 쯤으로 받아들여졌다. 재능이 있으면 감사히 여기며 그 일을 열심히 하면 되는거 아닐까 했던 정말 딱 초등생 수준이었다.


눈에 띄는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 대부분일진데, 저런 보석같은 재능을 가지고도 행복하게 깔깔거리며 살지 않았던 천재화가가 부럽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했다.


가이드 언니는 내 맘을 알고 있었나보다.

미켈란젤로가 끝없이 원했던 조각을 하지 못하고 교황의 명령으로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던 상황. 그게 싫어 도망하려했던 천재화가의 일생을 적절한 웃음과 함께 결국은 날 이해시켜주었다. 난 중매쟁이의 등에 떠밀려 배시시 웃으며 결혼을 결심하는 신부가 되어 있었다.


꼬박 4년을 매일 16시간씩 그려야만 완성할 수 있는 크기의 그림이란다. 어릴 때 알았던 그의 업적에 감탄하지 못한 건 매일매일 같은 일을 반복해야하는 직업인이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공부든 일이든 운동이든 하루 종일 매일 반복해야하는 지옥같은 어려움을 겪어본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주 조금 이해가 되려고 한다.


사춘기가 되었다고 나이어린 신규 담임 선생님을 때릴 듯 덤벼드는 6학년 아이들이 가득한 교실로 출근하기 위해 눈을 뜨던 날들도 있었고, 밤마다 젖을 달라고 울어대는 아이를 위해 정확히 여섯 번의 모유수유를 하며 아침을 맞기도 했다. 원하지 않는 싫은 일을 어른이라는 이유로 매일 반복해야하는 일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도망갈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그는 도망갔었고, 잡혔고, 돌아와 다시 그렸다. 결혼도 않고 연애도 안하며 외곬수처럼 날마다 벽에 그림을 그리며 늙어가고 죽어갔다.


이 모든 사연들을 전해듣고 다시 올려다본 천장 속 그림은 그간 몇 번 봐왔던 유명한 그림, 그게 아니었다. 마치, 이 남자가 썩 맘에 들지는 않지만 이 사람이 지금 이렇게 살기까지 얼마나 갖은 고생을 했으며 성실하고 근면하게 노력해왔는지 구구절절 설명을 듣고 나니 전에 없던 호감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덕분에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존경하는 인물 한 명이 내 마음에 쏘옥 들어왔고, 미술에 지나치게 문외한이었던 나는 좋아하는 화가가 한 명 생겼다.


투어회사 홈페이지에 우리의 <김보연 가이드> 언니에 대한 후기를 남기기로 했는데

이런.

언니가 많이 기다리겠다.

오늘은 꼭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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