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까

기억하지 못할거라는걸 알면서도

by 이은경



"너무 이른거 아니야?"

"괜히 애들 고생만 시킬 것 같은데"

"부부만 둘이 다녀와"

"나는 애들 좀 더 큰 후에 가려고"

"어차피 애들은 하나도 기억 못해"

......


초등 2,3학년 아이들과의 유럽여행을 떠난다 했을 때 들었던 걱정어린 조언들이다. 백프로 공감했다. 나 역시 누군가 이런 여행을 떠난다면 무조건 잘 한 결정이라고 하진 않았을게 분명하다.


왜 지금이냐고.

왜 유럽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번도 왜 지금인지 왜 유럽인지 생각해보지 않고 결정한 여행인지라, 공격적인 궁금증들에 선뜻 조리있게 답하지 못했다. 친하고 편한 사이라는 이유로 청문회를 하듯 여행의 의미와 목적을 묻는 사람들에게 난 탈세혐의라도 들킨 양 쩔쩔매며 속시원한 답을 못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떠오르는 말들을 한마디씩 툭툭하다보니 다행히도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답변을 막힘없이 내놓을 수 있게 되긴 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들의 질문에 주저없이 답하기 위한 대답을 만들어내고 있는 내 모습은 우습다. 정말.


가장 수긍하고, 또 절망하게 만든 건

'어차피 기억 못 한다'는 진리의 말씀이었다. 그렇다. 아이들은 기억을 못한다. 분명히 못 할 것이다. 사진은 언젠가 사라져버릴 것이고, 우리의 기억은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지워질 것이다. 기억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 아니었음에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좀 슬프다. 기억하지도 못할 일을 위해 들었던 수없는 준비와 돈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하면 안되는 헛짓이었다.


기억하기 위해, 추억하기 위해 떠난 건 아니었다. 정말 맹세컨대 아이들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고 계획한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정말 아이들이 세계의 역사와 미술에 관심을 가질 고학년, 중학생 때쯤이 적기일 것이며 그 정도쯤은 나도 모르지 않는데. 그렇다고 몇 년 후쯤 같은 장소를 또 여행할 만큼 여행을 많이 다닐 수 있는 형편도 아닌데, 그렇게 따지면 고비용 저효율의 멍청한 여행일 수도 있겠다.


<이런 세계도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냥 보고 느끼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머릿 속에 남는게 없고, 기억하여 자랑할 만한 기억력도 없을지라도 좋다. 우리 나라 밖에는, 그것도 우리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서양이라는 곳에는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가 사는 모습만 정답이 아니며, 우리가 사는 모습으로만 살아야하는게 아니라는걸 보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물론, 이런 엄마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가장 편하고 좋은 곳이다'라는 결론을 땅땅 내려버리긴 하더라. 상관없다. 집 떠나 보니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내년부터 바빠질 예정이라 긴 휴가는 꿈꿀 수가 없다. 몇 년간 그렇게 될지 모르겠단다. 나 역시 여유롭게 여행 준비를 할 수 있는 마지막 여름이었고, 이제 쉼없는 출근이 퇴직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준비한 여행이 아니었기에 아이들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먼 땅에서 먹고 걷고 자는게 너무 힘들지는 않도록 막내가 2학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다. 더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아이들을 위해 고학년까지 기다릴 것도, 남편의 바쁜 일이 끝나고 한 숨 돌릴 때까지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지금 못 가면 몇 년 후에 갈 수 있을지, 우리 넷이 단촐하게 떠날 수 있을지, 과연 갈 수나 있을지 누구도 장담못할거라는 확신이 분명히 있었다. 갈 수 있을 때 일단 가는 거다. 그거 하나는 확실했다.



여기가 어느 나라인지, 이 나라는 뭘로 유명하고, 지금 들어와 있는 박물관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그림이 얼마짜리인지. 아무것도 관심없는 아이들과의 여행이란 본전 생각에 피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시 다스렸다. 아이들이 지식을 늘리기를 바랬던게 아니라는 마음을 다시 떠올렸다.


아이들은 여행 내내 집을 그리워했고, 바라던 집에 돌아오자 쇼파에 몸을 묻고 즐겨보던 만화책을 이내 손에 잡고 단 몇 분만에 일상으로 돌아갔다. 난 아직 로마의 거리를 잊지 못하고, 핸드폰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곳을 기억하려 애쓰는데 참으로 쿨한 아이들이다.



지나간 것을 붙잡지 못헤 애쓰는 내 모습과는 참 많이 달랐다. 여행 내내 기분이 좋아 폴짝거리며 뛰어다니더니, 집에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한다. 지금. 여기. 가 가장 소중한 아이들이다.


궁금하다.

훗날 아이들이 사진 한 장 없이도 이 여행을 조금이라도 기억해낼 수 있을지. 그 때 어땠는지 아내와 자식들에게 이야기할 만한 기억의 조각들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지. 이 여행을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지.


지금.

여기.

아이들의 모습에서 배운다.

지금, 여기의 나를 즐기고 열심히 살기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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