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앵의 무단횡단. 뭐. 그것도 좀 멋지더라.
한국에서 날아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땅이 파리였는데, 그것 참. 여기가 한국이 아니구나를 깊이 느꼈던 건 뜻밖에도 몇 걸음마다 마주친 횡단보도에서였다. 아기자기하고 짧은 거리의 횡단보도와 낮은 높이의 신호등이 귀엽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아무렇지 않게 무단횡단을 일삼는 파리지앵들의 당당한 모습에 입이 딱 벌어졌다.
사대주의라 해도 좋다. 편견일 수도 있고, 고정관념? 이미지 고착? 뭐 그런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강대국이며 선진국이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기도 하고, 문화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의 시민의식이 고작 이것밖에 안된다는게 허탈한 웃음을 짓게 했다. 모든 것들이 한국보다는, 다른 나라보다 선진적이며 모범적일거라는 기대가 깨졌다. 애초에 논리적이지 않은 기대이긴 했다.
그들은 신호등이 보이면 <일단멈춤>을 잘 하지 않는다. 신호등 색깔과 상관없이 갈 길을 간다. 차와 만나게 되면 당당하게 손을 들어 차를 세우고야 만다. 신호등 앞에 멈춰 있던 일부 파리지앵들도 내 기대를 깨버리긴 마찬가지였다. 초록불이 켜지기 대략 3초 정도 전에 횡당을 시작한다. 첨엔 몇몇만 그리하는 줄 알았더니, 이게 이 동네 유행이더라. 그들을 보고 있다가 초록불인줄 알고 따라나서기도 몇 번. 그들의 그런 성질 급한 모습에 웃음이 나고, 우리는 이제 그들의 무단횡단을 볼 때마다 킥킥거렸다.
신호등을 지키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배웠다. 우리는. 나의 어린 두 아들에게도 난 그리 가르쳤었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빨간불에 무단횡단하다가 사고로 사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매우 중요한 규칙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쌩쌩 달리는 넓은 차도를 신호 하나에 의지하여 걸어다니는 아이들에게 횡단보도는 위험하고 여전히 불안했다. 그런데 이 곳, 사람들만 웃긴 줄 알았더니 횡단보도도 꽤 재미있었다. 다섯 걸음 정도면 왠만한 횡단보도는 건널 수 있었다. 무단횡단을 하네, 싶어서 쳐다 보면 어느새 반대편에 도착해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허허.
샹제리제 거리와 같은 대로는 파리 시내에 흔치 않았다. 그런 곳에서의 무단횡단은 한국과 다름없이 목숨을 건 도박이겠지만, 그런 곳은 별로 없으니 우리가 주로 본 건 짧은 횡단보도를 당당하고 멋지게 무단횡단하는 파리지앵들이었다. 아이들은 처음 그 모습에 깜짝 놀라고 분개했다.
"엄마, 저 사람들 무단횡단해!!!!!!!"
"헉, 지금 빨간불이잖아!!!!"
적응된다는 건 이토록 신기하고 무서운 것인가보다. 그러던 아이들이 이제 당연하다는 듯 무단횡단 하는 사람을 보고도 반응이 없는 것은 물론, 살그머니 그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살짝 몇 초 빨리 튀어나가는 사람들을 따라 나서기 시작하더니, 현지인이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에서 마치 현지인들마냥 좌우를 슬슬 보는 척하더니 후다닥 뛰어 건넌다. 요놈들. 어디서 못된것만 배워가지고. 더 웃긴건, 나도 어느새 그들을 따라 슬슬 발을 재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파리 생활 단 3일만에 제대로 파리지앵이 된 것이다. 그러면 안된다는걸 힘주어 강조하고 가르쳤지만, 한두번 해보니 참 편하고 합리적이고 생각보다 훨씬 안전하고 그랬다. 한두 번 해보니 그 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쉬웠다. 그냥 우리도 항상 신호등 무시하기가 생활이 되어버렸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몇 초의 시간이 참으로 지루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빨리 이 도시에 적응해버리다니.
한국인들은 성질이 너무 급하다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나무라듯 말할 때가 있다. '빨리빨리'가 입에 배었다는둥, 모든 것을 빠르게 하기 위해 재촉을 많이 한다는둥 하며 우리가 크게 잘못되었고 우리는 좀 열등하다고 자조섞어 말할 때가 많았다. 왠걸. 뭐 그리 급하다고 뭐 그리 어렵다고 신호등 색깔조차 잘 지키려하지 않는 선진 파리 시민들의 모습에 묘한 승리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훨씬 더 교통규칙도 잘 지키고 시민의식이 높단 말이다! 맘 속으로 혼자 우쭐해서 기분이 괜찮았다. 높은 시민의식을 지닌 우리 국민들이 자랑스러워졌고, 파리지앵들의 한국에 와서 신호등 지키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좀 봤으면 싶었다. 입을 딱 벌릴텐데. 분명.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든 이상한 생각.
왜. 이들은. 왜 파리지앵들은 무단횡단하는 당당하고 쭉 뻗은 다리마저도 멋스러워 보이는지, 눈에 뭐가 씌여도 단단히 씌였었나보다. 있는대로 자유롭게 만들어놓은 그들의 헤어스타일이며, 4계절과 50년 정도의 세월을 거뜬하고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들의 패션. 그 모습이 그들의 무단횡단마저도 멋져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면 안되는데, 그건 안되는 행동인데, 알면서도 그들의 자유로운 모습이 부러워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