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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Jan 13. 2019

몸살 덕분이다

몸살 덕분에 이럭저럭 좁디좁은 인간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것

몸살이 온다. 으실으실하더니 기어코 왔다. 올 때는 올 것 같은 느낌이 꼭 있다. 눈이 시리고 머리가 띵하다. 두통이 함께 오거나 한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어디든 좋으니 당장 누우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잠이 적었던 날의 피로감이나 기침 감기와는 다르다. 몸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되며 참기 힘든 괴로움이다. 기력이 없고 머리가 지끈 아프고 때론 배도 아프고 팔다리까지 쑤시다. 이름의 기원은 모르지만 단어가 주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느낌이 온다. 무언가 짠한 기운이 든다.      


사전을 찾아보니 

『몸이 몹시 피로하여 팔다리가 쑤시고 오한이 나거나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병』이란다. 영어로는 general[great] fatigue. 대단한 피로감을 말하는 단어가 맞나보다. 헌데 영어에는 이 단어를 정확하고 간결히 번역해내는 짝궁 단어가 없는 것 같다. 한국인들만의 질병은 아닐까 싶다. ‘홧병’처럼 말이다. 우리 한국인에게 한국어에 몸살이라는 단어가 있어 정말 다행이다. 어쩌지 못하게 몸이 좋지 않은데 ‘굉장히 피곤하네’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면 그 멋없음과 냉정함에 억울해질 것 같다. ‘몸살 났다’는 네 글자가 말해주는 많은 것들이 고맙다.      


『요즘 정말 많이 피곤하다. 일이 많았다. 무리했다. 좀 쉬어야하겠다. 쉴새없이 바빴다. 정신없었다. 몸이 좋지 않다. 노력은 하겠지만 참석이 어렵겠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마음은 안 그런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요즘 열심히 바쁘게 살아왔다. 몸이 힘듦에도 열심히 했고 그게 무리였던 거 같다. 지금 당장 큰 병이 걸렸거나 다친 건 아닌데 내일을 위해서라도 오늘 하루쯤은 약속을 취소하고 쉬어야겠다. 아프다고 거짓말 하려는 건 아니지만 단순히 피곤한 것보다는 훨씬 더 힘든 게 맞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몸살 났다’는 것만큼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에게 흡족한 단어가 있을까. 신기하게도 ‘피곤해서 못 가’라는 것과 ‘몸살 나서 못 가’라는 건 확연히 다르다. 피곤해서 못 가는 건 약속을 가벼이 여겼거나 갑자기 이 약속이 무지 귀찮게 여겨질 만한 다른 일이 생겼거나 고작 피곤함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는 불성실한 느낌을 주어 반면에 우리의 ‘몸살’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적당한 위로와 변명을 주는 착한 단어다. 많이 아픈 건 아닌지, 요즘 무슨 바쁘고 힘든 일이 많이 있었던 건 아닌지 하며 걱정까지도 덤으로 얻는 고마운 단어다. 그래서 때로는 이 단어를 악용하고 남발하는 이도 있긴 하지만 이 단어를 함부로 이용해 거짓을 말하면 상대는 신통하게도 눈치를 채고야 만다. 신기한 단어다. 손가락 까딱할 힘이 없이 몸이 힘들고 피로에 젖어 마음과 다르게 몸을 추스릴 수 없을 때 정말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몸살이 나서..’라고 말하면 상대는 바로 알아듣는다.      

‘그랬구나. 요즘 갑자기 추워졌는데 연말이라 바쁘게 무리했나보다. 몸 잘 챙기구, 나으면 보자. 약도 먹고, 주사도 맞고, 꼼짝 말고 많이 자구.’     


몸살이 왔는데 마음이 같이 왔다. 나 먹고 살기 바빠 몸살이 온 것뿐인데 꼭 본인 탓인 것처럼 안타까워도 해주고 걱정도 해주고 얼른 나으라고 격려도 보내준다. 걱정과 위로의 종합세트를 받을 수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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