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경 Jan 13. 2019

운수 좋은 날

달리기를 지독히도 못 한다.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데 늘 꼴찌였다.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하는데 성적이 바닥인 것보다는 낫다며 위안 삼아본 적도 있지만 운동회 날이 가장 싫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날인지 이해하기 힘든 꼴찌의 불만. 나 같은 꼴찌에게는 불만도 사치였다. 그게 싫으면 잘 좀 뛰던가. 혼자 중얼거려 본 적도 있다. 잘 뛰면 된다. 잘 뛰면 아무 문제도 없다.   

늘 꼴찌였다. 총소리와 동시에 여섯 명이 뛰어나갔다. 언제나 다섯 명이 내 앞에 뛰고 있었다. 포기하고 적당히 뛴 적은 한 번도 없다. 5등에 대한 기대를 접은 적도 없다. 열심히 뛰면 1등은 아니어도 4등이나 5등 한 번쯤은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운동회가 다가오면 나는 많이 떨렸다. 1등 후보들만 긴장하는 게 아니다. 우리도 긴장한다.      


3학년 가을 운동회. 그 날은 지독히도 운수 좋은 날이었다. 

덜덜 떨렸고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렸고 이를 악 물었다. 열심히 달렸지만 그 날도 내 앞엔 이미 다섯 명이 달리고 있었다. 그래 봤자 고만고만한 같은 조의 친구들이 내 눈엔 경마장의 튼실한 말처럼 보였다. 맨 뒤에서 헉헉대며 따라가는 말라깽이의 눈에는 친구들의 힘차게 달리는 뒷모습이 너무나 빠르고 견고했다. 다섯 마리의 말 뒤로 쓰러질 듯 헉헉거리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고개를 숙였다. 1, 2, 3 등이 아닌 나머지들이 모이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그쪽으로 가는 길은 익숙했다. 가던 그 길로 향하던 중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디선가 갑자기 급하고 강한 손이 나타나 내 손목을 꽉 잡아끈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손목에 보라색 잉크의 도장을 꾹 눌러 찍는다. 앙증스러운 꽃무늬 동그라미 안에 <1등>이라는 글씨가 팔뚝에 새겨졌다. 거친 그 손은 나를 데리고 가 1등 깃발이 꽂혀 있는 곳에 앉으라 했다. 처음 앉아보는 곳이었다. 마지막이기도 했다. 내가 1등이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1등이 아니라는 걸, 심지어 나는 꼴지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면 정말 나쁜 사람이다. 이 도장은 잘못 찍혔고, 저기 4, 5, 6등이 모인 곳이 내 자리라는 어떤 사실도 입에 내지 않았다. 조용히 숨을 고르며 상황을 살폈다. 내 옆에 앉은 아이 팔뚝에 2등이, 그 옆은 3등이었는데 이 친구들, 어딘가 낯설다. 우린 같이 달린 적이 없다. 세상 물정 알만한 눈치 빠른 아이였던 나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꼴찌인 내가 얼마나 늦게 달렸던지 다음 조의 1, 2등들이 내 뒤에 바로 붙어 달려왔던 것이다. 지나치게 빠른 그들 탓이었다. 우리는 누가 봐도 1, 2, 3등으로 보였고 그렇게 나는 감쪽같이 다음 조의 1등이 됐다. 이런 말도 안되는 확률의 일이 내 인생에도 일어난 것이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내게 일어난 행운은 평생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엄청나고 희귀한 일이라는 것쯤은 알만한 나이였다. 1등이니까 공책이 세 권이다. 1등이라는 도장이 찍힌 공책 세 권을 품에 안아 들고 조마조마하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보다 꾀가 덜했던 다음 조의 아이들은 별 말이 없었다. 평생 단 한 번 1등을 놓쳤을 그 아이의 우둔함이 고마웠다. ‘제가 1등이고 쟤는 우리 조 아니에요.’라고 외쳐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양심 없는 아이라며 날 비난할 것인가. 그래도 좋다. 억울할 건 없다. 난 그 날 많은 이를 속였다. 그러면서까지 간절하게 한 번 꼭 해보고 싶었던 달리기 1등이었던 탓에 대단히 고결할 것 없는 양심은 가볍게 뭉개어 버렸다. 


그 때를 생각하면 한 번씩 머리카락이 바짝 세워진다. 그래도 좋으니 제발 그 때의 기적 같은 행운이 한 번만 더 덜컥 내게 와주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늘 꼴찌였지만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달렸던 것처럼 열심히 달려 볼란다. 한 번쯤은 더 기적이 올 것도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원장님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