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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Jan 13. 2019

원장님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제발, 괜찮다고 말씀해주십시오

두 달에 한 번 피부과에 가야한다. 가는 게 아니라 가야 한다. 한 달에 두 번이 아니란 사실에 감사하며 지내고는 있지만 불행히도 나에겐 ‘주사’라는 질환이 있다. 술주정을 부린다는 말이 아니다. 안 부린다는 말도 아니다. 그거랑 다른 거다.      


《주사》

얼굴의 중앙 부위, 특히 코 주변부와 같이 돌출한 부위와 뺨, 턱, 이마 등에 주로 발생하는 지속적인 홍반과 구진, 고름집, 반복적인 홍조 및 혈관 확장. 정상인과 달리 주사 환자에서는 똑같은 자극에 대해서 혈관이 더 쉽게 늘어나고 늘어난 후에 원래대로 잘 오므라들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이 되풀이되면 혈관이 항상 늘어난 상태로 있게 되고 점점 심해지게 되는 것으로 고름집, 부종 등이 관찰되는 만성 질환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뺨과 코가 늘 붉다는 얘기다. 춥거나 더우면 심해지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면 얼굴이 빨갛게 터질 것 같다. 시간이 한참 지나거나 찬바람을 맞아야 간신히 진정이 된다. 불편한 병이다. 통증이 있거나 합병증이 있거나 하는 여타의 질병이 아님을 감사해야하지만 늘 붉어져 있는 얼굴을 보며 사는 것도 쉽지는 않다. 더 이상의 혈관 확장을 막기 위한 레이저 치료를 받고 있다. 여러 곳을 다닌 끝에 정착한 곳의 원장님은 신기하게도 언제나 크고 선명하고 밝은 목소리로 환자를 맞는다. 나처럼 불행한 피부를 타고 태어나 마음 고생했을 환자들을 위로하려고 힘을 주려는 작정인가보다.      


레이저 치료는 비싸다. 한 달에 10만원 정도를 이 치료를 위해 쓰고 있는 꼴이다. 내겐 비싼 돈인데, 이런 환자가 갈 때마다 그득하게 침대 하나씩을 차지하고 누워있다. 레이저 치료 후의 진정 관리를 위해 석고팩을 뒤집어쓰고 누가누군지 모를 형태로 줄줄이 누워있다. 업계 사정을 잘 모르는 나지만, 이 병원의 매출이 상당하다는 건 얼핏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병원 원장님은 40대 중후반 정도 되어보였다. 두 아이의 아빠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계시며, 사모님은 다른 곳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고 들었다. 초라한 내 붉은 얼굴에 꼼꼼하게도 레이저를 쏘아대며 불쑥 말을 꺼내셨다. 눈을 가린 나는 캄캄한 중에 번쩍번쩍한 레이저를 맞아가며 원장님의 하소연을 듣게 됐다. 꼼짝할 수 없게 만들어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니 무조건 들어야했다.      


제가 힘들다 하면 아무도 안 믿어요. 들어주질 않아요. 그런데 저는 정말로 요즘 힘들고 마음이 어렵고 우울한 기분이 자주 들거든요. 피부과 원장이 힘들다는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 거 알고 있어요. 그래도 힘든 건 사실입니다. 진상 환자들은 날마다 나타나구요, 병원 매출을 지금처럼 유지하기 위해 잠깐도 이 일을 쉬거나 그만둘 수 없다는 것도 참 부담이 되네요. 가장이기에 주어지는 삶의 무게는 모두 비슷하겠지만 수입이 큰 만큼 제게는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게 부담스럽고 쉽지 않네요.     


진심을 말했다고 믿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오죽 답답하면 얼굴이 벌개서 레이저 받자고 누워있는 아줌마에게 그런 말을 했겠나 싶다. 본인도 참지 못하고 힘들다는 얘기를 불쑥 할 정도면 마음이 많이 어렵단 얘기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이 있었다는 거다. 난 그의 말을 믿어주기로 했다. 비록 믿기 어려운 얘기라는 걸 잘 알지만 말이다. 나처럼 얼굴이 붉지도 않고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며 나보다 더 크고 좋은 집에 산다고 해서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넘겨짚지 않았다. 그는 분명 진실을 호소하고 있었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지만 누구에게라도 꼭 하고 싶었을 얘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매달 차곡차곡 매출이 쌓여가는 병원 원장은 힘들면 안되고 우울하면 안되고 사는 게 늘 신이 날 거라 생각했다. 힘들 때도 있겠지만 돈이 주는 보상을 받고 있으니 왠만큼의 어려움은 이겨낼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거라 생각했다. 그가 환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본인 상황이 여유롭고 흥이 나서일 거라 생각했다. 팍팍한 내 일상에 한 달 월수입이 지금보다 천만원이 오른다면 기필코 무조건 행복에 겨우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넉넉지 못한 월급을 탓하고 올라버린 대출이자를 슬퍼했다. 월급날 기다리며 사는 평범한 우리들은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원장님의 고민은 공감 받을 수 없고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감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진심을 오해받으며 산다. 그 어떤 큰 고민도 한 달 수입액이 공개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게 참 불쌍타.      

돈이 행복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돈이 아쉽다. 돈이 좋다. 돈이 필요하다. 돈을 원하고 돈을 구한다. 돈이 없어 불행하다 느끼고, 돈이 많으면 필시 행복할거라 장담한다. 돈이 나보다 많은 사람은 나보다 분명히 행복할 거라,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부족하고 팍팍하고 초라하고 아프고 힘든 삶이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이다. 그래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 애쓴다. 돈이 가져다 줄 많은 좋은 것들을 기대하며 하루를 꽉 차게 살아가려 애쓴다. 돈이 많아도 기쁘지 않거나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더 슬픈 일일 것 같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하루가 있을 거라 소망하며 사는 것밖에 딱히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돈이 많아도 어차피 힘들긴 마찬가지고 별달리 좋은 것도 없고 크게 나아지는 게 없다면 조금이라도 열심히 살아보자고 외치던 파이팅이 머쓱해진다. 그래서 원장님의 마음을 믿어줄 수가 없다. 그걸 믿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등대의 불빛 같던 희미한 희망도 없어져버리는 것이기에 그걸 믿을 순 없다. 미안하지만 믿어줄 수가 없다. 나도 살아야 하기에. 내게도 붙잡고 살아볼 만한 희망이 있어야 하기에. 열심히 살면 조금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기에.      

바란다면, 나보다는 훨씬 형편이 좋은 어떤 환자가 원장님의 진심을 믿어주고 두 분이 서로 위로를 나누었으면 한다. 돈 많다고 행복한 거 아니라고, 오히려 골치 아픈 일이 더 많다는 그들만의 위로를 주고받으며 어려움을 이겨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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