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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Jan 13. 2019

대비했어야 한다.

집 앞 마트에 잠시 나설 때도 화장을 하고 머리를 감는 이유

동네 국수나무집에서 시원하게 잔치국수 한 그릇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정말 좋아했던 드라마 중에 ‘식샤를 합시다’라는 프로가 있었는데 국수나무 협찬으로 촬영을 해서인지 매 회 국수나무의 메뉴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드라마의 여운이 남아있던 나는 거기에 반해 홀리듯 국수나무집으로 들어갔고 시원하게 한 그릇 먹고 부른 배로 여유롭게 팔자걸음을 걷고 있었다. 배가 부를 땐 팔자걸음이다. 안 그래도 편하게 입고는 다니기는 하지만 오늘따라 내가 입고 있었던 옷은 유난히 푹 퍼진 느낌의 전형적인 아줌마 패션이었다. 아줌마가 아줌마 패션을 했으니 잘 한거다. 어쨌든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동네 산책을 하다가 여유롭게 가볍게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다시 산책하듯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 이것은 육아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엄마들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함이다. 이제는 혼자 먹고 혼자 걷는 아이들이 돈까스로 배를 채우고는 신이 나서 날뛰는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아저씨가 된 남편과 천천히 걸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내 눈 앞에 있는 그 남자는 정말 그 남자가 맞았다. 몹쓸 눈썰미가 원망스럽다. 못 알아봤다면 난 그대로 그냥 기분 좋은 저녁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그 남자도 나도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말았다. 그냥 그렇게 서로 스쳐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도 나도 그러질 못했다. 확연하게 굳어버린 내 표정은 한 눈에 봐도 ‘나는 당신과 마주쳐서 매우 당황했습니다.’라고 써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걸음을 멈추기까지 했다. 나란히 걷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남편은 무심하고 둔한 성격 그대로 마냥 계속 걷는다. 둔한 사람과의 결혼 생활은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다. 지금 남편이 중요한게 아니다. 왜 저 사람은 하고 많은 동네 중에 우리 동네에 와서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 나는 왜 오늘 이런 거지같은 아줌마 패션을 하고 집을 나섰는지, 머리는 왜 안 감고 동여 메고 나왔는지, 왜왜왜. 

어디서 어떻게 누구랑 살고 있는지 어떻게 변했고 얼마나 그대로인지 궁금해지는 사람이었다. 노을이 어슴프레하게 깔리는 저녁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시절 가요를 따라 흥얼거리다보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의 조각이 남아있어서가 아니라, 궁금함이다. 진심을 믿어 달라. 조금이라도 미련이 남았다면 비밀로 했을 감정이다. 나랑 헤어지고 누구랑 결혼했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는데 내가 궁금한 건 그래서 지금 어떤 모습일까이다. 십년도 훌쩍 흘러버린 지금 혹시 머리가 벗겨졌을까 배가 많이 나왔을까 운동으로 제법 잘 다져졌던 어깨 근육은 그대로일까. 궁금해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디서든 한 번 우연히 보고는 싶었는데, 그렇게 쉽게 만나지지는 않았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가 없으니 항상 대비했어야 한다. 그 사람의 변한 모습보다 나를 더 당황하게 한 건 나의 후즐그레한 상태였고, 그게 두고두고 며칠을 속상하게 했다. 대비했어야 한다.       


행인지 불행인지 첫사랑 혹은 예전에 만났던 그 남자와의 우연한 마주침이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 에버랜드란다. 이제 다들 부모가 되어 부모 노릇하느라 야심차게 도착한 에버랜드. 얼굴의 개기름과 들뜬 선크림은 기본이다. 모자, 바람막이, 선글, 애들 먹던 팝콘통, 생수병, 물티슈, 아메리카노가 한데 섞여 뒹구는 축 쳐진 배낭, 본전은 뽑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멋은 포기한 가장 편한 청바지에 맨날 입던 그 티셔츠, 굽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가장 편해서 선택된 운동화까지. 괜찮아 지금 내 행색이 좀 초라하긴 하지만 아이를 위해서 오늘 하루쯤은 내 모습은 포기할 수 있어. 기념품샵 거울에 비친 엉망인 나를 토닥인다. 마음을 추스린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아이들과 같이 에버랜드에 온 엄마들은 하나같이 엉망들이니까. 거기선 그냥 그게 자연스러우니까. 

여전히 큰 키와 흰 피부. 탄력은 좀 떨어져 보이지만 아기아빠라기보다는 총각이라 해도 믿을만한 선글의 남자. 저 남자, 내가 아는 그 사람인 듯하다. 그 남자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온다. 그가 누군지 알 것 같다. 너무 확실해서 도망가 버리고 싶어진다. 그를 너무나도 잘 빼닮은 인형 같은 아이를 안고 있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맨홀 뚜껑이 열려 그 안으로 콱 빨려 들어가 버렸으면 싶다. 그렇게도 궁금하고 한 번쯤 스치듯 영화처럼 마주치고 싶던 그 사람이 물티슈와 생수병을 손에 들고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던 내게로 다가온다. 애도 거지꼴. 오늘따라 더 꾀죄죄하다. 이런 최악의 상황을 대비했어야 하는데,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던 건데 긴장을 놓고 살았던 게 한스럽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의 환상과 추억 속의 내 모습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사람 이제 다시 볼 일 없고 보고 싶지 않다. 한 번 이렇게 스쳤으면 족하다. 문제는 나다. 그에게 보여준 내 거지꼴이 생각날 때마다 이불을 발로 차대며 있는 대로 짜증이 날 것 같다.     


제일 이쁘던 스물 다섯 살 신규교사 시절, 첫 발령을 받았던 학교의 교장 선생님께서는 나를 보실 때면 뜬금없이 ‘예뻐요’라는 말씀을 자주 해 주셨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멘트 때문에 선배 여선생님들이 모여서 나와 교장 선생님을 돌아가며 잘근잘근 씹으셨단다.) 맘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 같았던 교장 선생님은 공문 하나도 제대로 작성 못하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달리 칭찬의 말씀을 찾지 못해 결제가 끝날 때면 ‘예뻐요.’라고 마무리해주셨다. 요즘 같으면 성희롱이니 뭐니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를 딸처럼 예뻐해 주시던 참 고마운 분이셨다. 학교를 옮기고 이사를 하며 소식을 알 수 없던 그 분을 5년 만에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그 때의 나는 가뿐히 30키로가 불어난 만삭 임산부였고, 그 분은 여전히 허허 웃음 지으시는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 계셨다. 마주친 순간 뚱뚱하고 초라한 내 모습이 너무 싫어 땀을 삐질 흘렸다. 도저히 이런 꼴로 나를 ‘예쁘다’고 칭찬해주시던 분 앞에 서고 싶지 않았다. 저는 이런 만삭의 돼지가 되었어요, 라는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남편 뒤로 슬쩍 숨었다. 실패. 둔한 몸으로 급하게 움직이느라 제대로 숨지도 못했는데, 굳이 숨을 필요가 없었다. 얼굴이 벌개져서 어쩔 줄 몰라 당황하던 내 앞으로 그 분이 매너 좋게 지나가신다. 심지어 서로 길을 비키느라 눈이 마주쳤는데, 정말 다행히도. 그리고 정말 불행히도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셨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많이 달라져 버린 건지, 그 분의 기억력이 엉망이라고 핑계를 대기엔 내가 봐도 내가 참 많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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