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경 Jan 13. 2019

피가 남아서

어떤 사람들은 피가 좀 충분하다

대형고속버스에 빨간 적십자 마크를 단 헌혈차가 들어왔다. 20년 전 여고 시절. 버스는 운동장 한가운데 보기 좋게 자리 잡았다. 지금은 이런 반강제적인 단체헌혈이 없어졌는가 싶지만 우리 어릴 땐 잊을만하면 한 번씩 버스가 들어왔다. 헌혈 버스가 도착하면 교실엔 엷은 술렁임이 오갔다. 오늘 헌혈을 할 것인가, 너는 할 것이냐.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팔짱낀 여고생들이 헌혈차로 향했다. 오늘의 헌혈 선물은 무엇일까가 가장 궁금하다. 초코파이, 쥬스 같은 간식 종류가 대부분이나 가끔은 로션, 문구 용품, 책, 인기가수의 CD인 적도 있었다. RH-혈액형을 가진 어떤 친구는 삐삐를 받았다. 선물에 눈이 멀어 눈에 띄기만 하면 헌혈차에 오라 팔뚝을 걷던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한참 잘 먹고 잘 자는 시기의 고등학생들에게서 얻은 신선하고 농도 짙은 혈액은 수혈을 간절히 기다리는 환자에게 전달될 것이다. 의미 있는 나눔이다. 그날따라 너도나도 헌혈에 나서는 친구들을 따라 버스에 올랐다. 유난히 건강했던 나는 피가 쭉쭉 나왔다. 바늘 꽂기 편하도록 핏줄이 통통하니 선명했고 피가 나오는 속도 역시 흐뭇하게 만점이었다. 진하고 탐스런 피가 빠른 속도로 파우치를 채웠다. 간호사 언니와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너무 잘 나온다 싶었다. 과유불급. 문제가 생겼다. 여고생 헌혈액 기준치를 훌쩍 넘어 성인 남자의 표준 헌혈양에 이른 것이다. 다른 여고생들의 피가 나오는 속도를 압도한 결과였다. 같은 시간 팔뚝을 내밀었던 옆 침대의 친구가 절반도 채우지 못한 빈약한 자신의 파우치와 비교하며 부러워했다. 간호사 언니는 기분 좋게 웃으며 기준치보다 피가 조금 더 나왔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고맙다고도 했다. 이 얼마나 행복하고 다정스런 광경인가. 가득 채워진 파우치를 들고 언니가 미소를 지었다.

불행히도 본인은 사정이 달랐다.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쓰러지는 건 아닐까. 괜찮은 걸까. 몸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마음이 약해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피가 몸을 빠져나가 버렸다는 생각에 염려스러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당황한 간호사 언니가 아무리 달래도 멈추지 않는 여고생에게 괜한 걸 물었다.


학생, 다시 넣어 줄까?

네.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다시 누워 팔뚝을 걷었다. 좀 전에 막 빠져나온 따끈한 나의 피를 다시 넣었다. 한 방울 남김없이 다 넣었다. 이제야 순간의 어지럼과 뭔지 모를 메스꺼움이 사라지는 듯했다. 휴, 살았다. 웃으며 교실로 향했다. 결과적으로는 헌혈을 하지 않았지만 초코파이를 두둑히 챙겨주셨는데 이 덕분에 교실의 친구들이 반색을 했다. 피는 나누지 못했지만 초코파이를 나누었고, 이것 또한 의미 있는 나눔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오랜만에 헌혈차에 올랐다. 지난날의 부끄러움을 씻고 싶었다. 제대로 나누고 싶었다. 이번에도 술술 잘 나왔다. 아, 미리 당부는 해두었었다. 피가 좀 빨리 나오는 편이니 권장량을 넘지 않도록 체크해 달라 부탁드렸다. 정확하게 성인여성 권장량만큼의 피를 뽑아내고 흐뭇한 마음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눈앞이 깜깜해졌다. 위에서부터 검은 커텐이 내려오는 것처럼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그 길로 정신을 잃었다. 아득히 의식을 잃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말했듯이 나는 건강한 성인 여성이고 조금의 빈혈 증세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피 한 주머니 뽑아내고 무려 그 자리에 스르륵 쓰러진 것이다. 한참을 누워 시간을 보낸 후에야 정신을 챙길 수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피를 다시 넣을 정도의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간호사 언니가 가방 열으라 했다. 메고 다니던 백팩을 열었다. 터질 듯이 많은 초코파이를 넣어 주셨다. 우유도 주셨고 음료수도 주셨다. 묵직한 가방을 메고 나오니 또 친구들이 반겼다. 우리는 교정 어느 벤치에 나란히 앉아 깔깔대며 먹었고 친구들에게 가방을 열라 하여 조금씩 똑같이 나누어 주었다. 역시 의미 있는 나눔이었다. 아주 드물게 요즘도 ‘헌혈+영화’라고 적힌 종이를 발견할 때가 있다. 간결한 몇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오랜만에 헌혈도 하고 영화도 볼까 싶다가도 그 놈에 피 때문에 겪은 몇 가지 일들이 하나씩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비했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