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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Jan 13. 2019

착한 사람의 기준

건강함의 상징, 재활용품 분리수거


요즘 들어 내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의 기준은 단순한데, ‘재활용품을 정확하게 분리하여 버리는 사람’이다. 위의 기준으로 보자면 나는 그닥 착한 사람은 못 된다. 조금 더 착해져야 한다. 그 놈의 귀찮음이 죄다. 귀찮음을 이기고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 아직 멀었다. 

우리 아파트는 화요일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만 분리수거를 한다. 그 시간을 놓치면 한주 내내 스티로폼 더미 옆에서 쌀을 꺼내어 밥을 짓고, 접어놓은 박스들을 들춰낸 아래의 고구마를 꺼내 삶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왠만하면 요일을 기억하려 바짝 신경을 쓴다. 물건을 살 때 보다 쌓여 있던 상자며 캔 따위의 재활용품을 싹 내다 버리고 들어올 때 더 상쾌하다. 쓰레기를 쌓아 놓던 뒷베란다가 허전하게 달라 보인다. 덥수룩하던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다듬고 들어오는 남편을 보는 느낌이다. 


일주일간 기다리고 기억하던 분리수거 시간이 시작되면 얼핏 동네 잔칫날 같다. 양손 가득 큼직한 가방이며 상자를 든 사람들이 하나둘 같은 곳을 향해 모인다. 음식을 해 들고, 선물을 사 들고 이웃의 잔치를 찾아온 손님들 같다. 그 날을 나만큼이나 기다렸는지 표정들이 밝다. 화요일 저녁 시간이 피크 타임인데 운 좋게도 아주 가끔 시간이 맞으면 뜸했던 이웃을 마주쳐 짧은 수다를 나누는 기회도 생긴다. 분리수거장에서 수다를 떨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둘째가 버려진 상자 더미에 숨어 홀로 숨바꼭질 놀이에 빠져 있던 적도 있다. 


분리수거의 빠질 수 없는 재미는 남들 사는 모습 구경이다. 신문을 받아보는 사람은 줄고 있고, 인터넷 강의 때문인지 다 푼 문제집 더미도 요즘엔 좀 뜸하다. 캔이 잔뜩 쌓여 있는 고철함을 들여다보면 요즘 인기 맥주 브랜드를 짐작할 수 있고, 종이 상자들 틈에 쌓인 치킨과 피자 배달 박스를 보며 익숙치 않은 새 상표의 치킨과 피자를 알아간다. 나랑 똑같은 쇼핑몰에서 옷을 구입하는 여자가 우리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그 곳에서 알게 됐는데 우리가 그 곳에 주문한 옷이 똑같은 것이라면 어떨까. 딱 한 군데 쇼핑몰만 이용하는 고집스러운 면이 있는데 그 여자도 그럴까 궁금해진다. 건조기를 새로 들인 집에서 내놓았을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건조대도 하나씩은 나와 있고, 여름이 끝날 무렵엔 손잡이가 빠져 초라하고 색바랜 선풍기도 흔하다. 바닥이 다 긁힌 후라이팬이나 손잡이 떨어진 냄비가 한쪽 구석에 나와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만 궁상떨고 사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스치듯 위로를 받는다. 어느 집 찬장 구석을 뒤져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던 쓸모를 다해 버려지는 초라한 살림살이들이 이웃을 위로하며 그 곳에 모여 있다. 


분리수거를 하러 나가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이 더 드물었다. 꼭 하나씩은 쓸만한 놈을 건져 들고 들어왔는데, 겉보기에 멀쩡해서 주워가보지만 한 두번만 사용하다 보면 왜 내다버렸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바로 다음 주 분리수거 날 다시 들고 나간다. 그래도 들고 들어오면 무조건 환영받고 오래 쓰는 건 아이들 책이다. 오래되긴 했지만 내용 좋은 전집을 발견한 날이면 입이 헤 벌어져 그 무거운 걸 무거운 줄도 모르고 들어 나른다. 아이들도 좋아하며 코까지 높이 턱턱 쌓아 들고 따라온다. 책장이 비좁다. 비좁아도 좋다. 책을 주운 날은 기분이 최고다. 이런 날은 마음도 잔칫날처럼 풍성하고 흥겹다. 굉장한 영재 아이를 키우는 아빠의 강의를 들었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이들 책은 모두 분리수거장에서 주워다 읽혔단다. 그 후로 더 활발히 주워 날랐다. 이토록 귀가 얇고 단순한 사람이다.

분리수거는 내게 단순한 일거리가 아니었다. 나름의 즐거움을 찾는 작은 행사였다.  물론 예전의 나는 굉장히 착했다. 정확하고 바르게 쓰레기들을 분리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다. 추운 날은 작정하고 장갑을 끼고 나가 작은 것 하나도 바르게 분리해서 버렸다.

나이가 들었나보다.

꾀가 났다.

아무렇게나 내버리고 가는 사람들 때문에 한숨 쉬던 나였는데, 점점 귀찮아졌다. 모두가 플라스틱인데 딱 하나만 철제 커피 캔이면 그것도 그냥 플라스틱 자루에 쏟아버렸다. 비닐봉지만 모으는 곳에 종이 조각도 딸려 들어가고, 봉지 속 음식 남은 것도 따라 들어갔다. 종이 상자를 쌓아놓는 곳에 플라스틱을 잘못 버렸는데, 다시 줍기가 귀찮아 그냥 버려두고 들어와 버렸다. 늦은 시간이라 버리러 나온 사람도, CCTV도 없다. 오직 내 양심 하나만 믿어야 했다. 내 양심은 누군가 보는 이가 있을 때만 작동하는 힘없고 약한 것이었다. 춥다고, 덥다고, 시간이 늦었다고, 출근 시간이 바쁘다고, 버릴 게 너무 많다고 하는 이유들을 대며 대충 해버리고 끝낸다.

알면서도 다시 하기 귀찮아, 제대로 하기 귀찮아 스윽 모른 척해버리는 일들이 점점 늘어간다. 잘못된 그 일의 결과가 당장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그게 잘못되지 않은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 커피 캔 하나가 플라스틱에 섞여 들어간다고 해서 누가 내게 제대로 좀 하라고 소리를 질러대지 않으며, 범칙금 딱지가 날아오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고 얼핏 보면 캔과 플라스틱은 조금 닮았다. 그런 이유로 그냥 그렇게 슬쩍슬쩍 양심을 저버리고 산다.


 분리수거를 할 때면 아이들에게서 귀한 것을 배우고 돌아온다.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돌아온다. 다짐으로만 끝날 때가 너무 많은 보잘 것 없는 양심이지만 다짐조차 없다면 얼마나 엉망이 될지 잘 알기에 일단 굳게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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