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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Jan 13. 2019

아메리카노는 모르겠다

사실 난 커피 맛 모르는 여자

이 쓴 물을 왜 마시고 앉아 있어야 하는가 싶다. 아직도 모른다. 커피 맛을. 커피하면 믹스였는데, 너도나도 믹스였는데 믹스 중에 빨강이가 좋은지 노랑이가 좋은지로 서로의 취향을 확인하곤 했었는데 그 때가 새삼스럽다. 커피는 공부가 필요한 요즘 사람들의 필수 과목이 되어버렸다. 여전히 믹스가 좋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었다.

믹스 커피를 좋아한다거나, 손님을 초대했는데 집에 믹스 커피밖에 없으면 당장에 촌스러워진다. 미안해진다. 커피 머신 정도면 괜찮고, 캡슐 커피도 좋다. 그게 아니라면 커피를 내리는 메이커라도 한 대 있어야 주인과 손님이 서로 불편해지지 않는다. 신선한 원두를 당장 갈아 내려줄 정도의 도구들이라면 주인도 손님도 화기애애해진다. 원산지는 어디인지, 어디서 언제 구입한 원두인지 정도의 대화는 필수다. 그런게 하나도 없어서 손님을 초대 못하게 되었다. 핑계지만 영 아닌 말은 아니다.

커피라고는 자판기에서 뽑아먹는 종이컵 믹스 커피가 전부이던 내가 커피 전문점의 커피를 처음으로 입에 댄 건 아이러니하게도 런던의 스타벅스였다. 아메리카노도 못 마셔본 촌년이 런던의 스타벅스라니. 안 어울린다. 어쨌건. 뭐 이런 세상이 다 있나 했다.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만큼은 시간이 잠시 멈춘 듯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하고 두근두근하며 받아든 아메리카노의 씁쓰름한 맛은 실망스럽고 놀라웠다. 분위기, 음악, 커피향, 함께 했던 사람들 모두 만점인데 커피맛이 반전이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의 주머니를 털어간 비싼 커피가 아까워 한 모금도 안 남겼다. 어찌하여 런던의 커피는 단맛이 나지 않는가 싶어 그 잘나 보이던 런던 시민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그 날 저녁 숙소로 돌아와 노랑이 두 개로 달달하게 속을 풀었다. 소주로 뒤집어진 속을 라면으로 풀 듯 아메리카노로 버린 속을 믹스로 살살 달랬다.

그랬던 아메리카노에게 마음을 열게 된 일이 내게도 있었으니.


스물 여섯살의 아가씨에게 터키라는 낯선 땅에서의 외국 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 또래의 여자들은 죄다 히잡을 두르고 다니는 이슬람 국가에서 긴생머리 동양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안되는게' 많은 삶이었다. 터키에서의 시간은 좋은데 힘들었다. 가장 아쉬운 사실은 '밤에 돌아다니면 안된다는 것'이다. 한참 놀고 싶고 하고 싶은 거 많은 나이에 가끔씩 폭탄테러가 일어나는 도시에서 가족 없는 삶을 시작했다는 것부터가 많은 '안되는 삶'의 시작이었다. 회식이나 MT, 모임, 쇼핑, 수업, 연습.. 한국에서 하던 거의 모든 이벤트는 밤에 일어나곤 했었는데 그것 없는 삶이 이렇게나 심심할 줄 몰랐다. 그 때 커피를 배웠다. 커피 맛을 알았다. 아메리카노가 달콤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커피맛도 알았고 인생도 알았다.

빠듯한 생활비에 비해 높은 커피값이 부담스러워 한 달에 한 번도 어려웠지만 앙카라 찬카야의 스타벅스는 단조로운 일상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 곳에서 함께 커피맛을 제대로 배운 벗, 현미와는 한국에서도 꼭 스타벅스에서 만난다. 결혼하고 애 낳고 아옹다옹 살고 있는 지금이지만 스타벅스에 가면 머릿속에 가득한 일상의 고민들이 일순간 잊혀진다. 벌써 10년이 넘은 기억이지만 우리는 그 시절의 철없고 고민 없던 아가씨로 그저 돌아간다. 고민이라면 서양인 체형에 맞춰 나온 옷들이 우리가 입기에는 너무 길거나 화려해 새 옷을 사기가 힘들다는 정도였을 거다.


한국에 돌아온 후 몇 년간 믹스 커피를 달고 살았다. 한국 초등 교사의 하루는 믹스 커피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이들에게 참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서너잔의 믹스가 필요했다. 임신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믹스를 마실 때 뱃속의 아이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었을 만큼 열심히 마셨다. 미안해서 힘들었다는 거지, 못 마셔서 힘들었다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달달한 커피가 좋았고, 한 번씩 들르는 스타벅스에서도 달달하기로 소문난 캬라멜 시럽 듬뿍 뿌려진 커피만 주문했다. 앙카라에서 살짝 외도를 했었지만 내 사랑은 달달한 커피임이 분명했다. 이대로 죽을 때까지 달달한 커피만 달고 살게 될 거라 믿었다. 그래도 큰 상관이 없었고, 그게 난 정말 좋았다.

뭐 대단히 중요한 선택이라고 커피를 고를 때마다 시간이 걸린다. 여전히 내 입엔 쓴 아메리카노와 달달하고 부드러운 바닐라 라떼 사이에서 갈팡질팡 지체된다. 그 날 그 자리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고 찔 살이 안찌는 것도 아니요, 바닐라 라떼를 마신다고 단번에 비만이 되는 것도 아닌데 때마다 고민이다. 커피 맛을 모르면 이렇게 된다. 정말 좋아하는 맛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면 나처럼 된다. 뚜렷한 취향 없이 살다보면 어떤 날은 자몽에이드를 마시고 있고, 또 어떤 날은 말도 안되는 칼로리의 프라프치노를 국밥 먹듯 빨대로 퍼먹고 있기도 하다.


어느 자리에서나 선뜻 항상 아메리카노를 고르는 사람이 멋있어 보인다. 커피의 깊은 맛을 알고 있는 듯하다. 말도 안되는 소리란 걸 잘 알지만 솔직히 그렇다. 어른 흉내를 내고 싶은 중학생이 용기내어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는 커피를 받아들자마자 후회하는 꼴이라니. 마음은 바닐라 라떼와 캬라멜 마끼아또에 가 있는데 계속 그것만 마시다간 영영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용기 내어 세 번에 한 번쯤은 아메리카노를 시도해본다. 커피 맛 좀 안다고 자랑하고 싶은데 다들 손에 든 게 아메리카노다. 큰 맘 먹고 아메리카노 마시고 있는데 칭찬해주는 이가 없다. 어째.  아직도 모르겠다. 그 씁쓸한 액체의 깊은 맛을. 더 맛있고 덜 맛있는 아메리카노는 도대체 어떻게 구분하면 되는 건지, 신선한 원두는 향이 아니고 그냥 제조일자로 알아보면 안되는건지. 맛도 향도 아무 것도 모르고 구분 못하는 나같은 커피 초보에게는 어른들의 정치 토론 같은 커피 얘기가 어렵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에 소외되지 않으려 애써본다. 모르지는 않은 척. 

알긴 아는데 취향이 안 맞는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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