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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Mar 09. 2019

캡틴 마블 - 몸짓의 향연

너나 나나 똑같이 팔다리 두 개씩인데 

남편과 아들은 들썩거렸다. 


언제부턴가 마블 시리즈가 개봉할 때마다 일어나는 들썩임이었고, 다가오는 6월이면 또 한 차례 일어날 일이기도 하다. 가능하면 마블 영화 멤버에서 빠지려고 애를 쓰고 잔머리를 쓰는데, 오늘은 어쩌다보니 함께였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어, 하는 사이 3관의 G9 좌석에 배치되었다. 

원치 않은 영화를 보게 될 땐 작정하고 잠을 청하는 편인데 오늘은 짧은 낮잠을 자고 나온 탓에 천자문을 외워도 될만큼 뇌가 맑았다. 이렇게 맑은 뇌로 조금도 관심없는 마블 영화를 봐야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흔한 스마트폰 화면도 들여다볼 수 없는 공간에서 맑은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눈 앞의 영화를 열심히 보는 것 밖에 없었다. 무수한 마블팬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 남편과 아들에게 가장 미안하다- 나는 이런 영화를 돈 주고 보기 싫어한다. 공짜로 보래도 싫어한다. 극도로 내 취향이 아니다. 마블은 잘못이 없고, 나도 잘못이 없다. 

취향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입장한 극장인 탓에 오늘은 심심풀이 팝콘 한 통 없다. 두 시간 넘는 영화를 무얼 하며 버텨내야할까. 가장 큰 상영관이었음에도 젊은 남녀들로 가득하다. 연인들에게, 친구들끼리 이보다 더 적당한 영화는 적어도 이번 주말 극장가엔 없었다. 그들의 기대어린 눈빛과 설렘, 봄을 맞은 버버리 코트의 상큼함이 느껴져 남편의 겨울잠바를 걸치고 나온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초라함은 영화와 함께 쑤욱 깊어졌다. 영화 시작 30분이 지나도록 스토리의 감을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 쫓아가기 급했다. 과목으로치면 수학이고 운동으로 치면 배드민턴, 요리로 치면 이제 막 시집 온 새댁이 시어머니 첫 생신상 차리느라 애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침 옆에는 나만큼이나 스토리 이해력이 딸리는 작은 놈밖엔 없었고 이해되지 않는 장면과 대사마다 자문자답해가며 근근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한 시간을 넘어가며 슬슬 스토리가 감이 잡히자 내 눈에 들어온 건 주인공 캐럴의 몸이었다. 빵빵한 가슴과 탄탄한 몸매는 물론 부러웠지만 그보다 시선을 사로잡은 건 비현실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그녀의 화려한 몸짓이었다. '몸짓'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지만 '액션'이라는 진부한 단어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매 장면 생동감있게 움직이는 펄펄 뛰는 생선같기도 하고 초원을 달리는 산양같기도, 하늘의 독수리같기도 했다. 말도 안되게 싸움을 잘하고 한 대 맞고 다시 펄떡 일어나 또 싸우고 비행조종도 멋들어지게 잘해내는데, 말이 안되는 걸 알면서도 와, 하는 탄성이 계속 나왔다. 마블의 모든 시리즈는 원래 그런 비현실적으로 멋진 몸짓의 향연이라는 것을 영화 끝나고 아들의 얘기를 듣고서야 알았다. 주먹 한 방에, 발차기 한 번에 빵빵 나가떨어뜨리는 캐럴의 속시원한 액션은 몸치 소리를 들으며 몸쓰기를 세상 가장 싫어하는 내게 로망 그 자체였다. 


사실, 다들 몸을 잘 썼다.




몸 쓰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에 대한 로망과 부러움이 많다. 

헬스장 탈의실에서 군복을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여군과 마주쳤다. 예쁘장한 얼굴과 다르게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하고 두꺼운 허벅지를 보고 있자니 저런 멋진 몸을 갖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단련시켰을까 싶어 눈을 떼지 못했다. 나의 처진 뱃살과 구부정한 등이 거울에 정확하게 잘 비쳐보이고 있었다. 샤워를 막 마치고 나온 벌거벗은 몸으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고야 말았다. 

"군인이세요? 우와" 

"네!" 

씩씩하고 경쾌했다. 몸 잘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격이 좋다. 부러움에 근거한 편견이다. 나의 쭈뼛거림이 부끄러워졌다. 

"어떻게 군인이 되셨어요?" 

"되고 싶었어요." 

"아..."

힘든 훈련을 겪어내야하는 쉽지 않은 길인 것을 알면서도 되고 싶었다는 그녀의 대답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혼자 어머니를 모셔야 해서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찾은 직업이 군인이에요. 별로 하고 싶진 않아요.' 였다면 내게 큰 위로가 되었을텐데. 몸을 써야만하는 (물론 머리도 쓰지만) 대표적인 여성의 직업인 군인이 되고 싶었다는 그녀의 여유있는 대답에 1패를 당했다. 몸을 움직여서 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가장 싫고 가장 취약한, 그래서 올림픽 시즌마다 국가대표 여자선수들의 경기를 정신없이 입벌리고 감상하는 전형적인 몸치가 겪어내야 하는 패배. 




시종일관 날아다니며 손바닥으로 불을 뿜어대던 주인공 캐럴은 마지막까지도 세상 멋졌다. 다른 미션을 수행하겠다며 쿨하게 지구를 떠나버렸다. 어디서든 똑부러지게 몸을 움직여 세상을 구하고 불의에 맞서리라 확신한다. 평생 저렇게 탄탄한 몸매와 날렵한 몸짓으로 손끝하나 다치는 일 없을 것이며 그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으리라. 쿠키 영상이 두 개라는 걸 알고 있던 남편과 아들은 꿈쩍하지 않고 그 많은 엔딩 자막을 인내심있게 기다렸고 헛웃음을 유발한 두 개의 쿠키 영상을 보면서도 눈에 어른거린건 그녀의 멋진 액션들이었다. 어디까지가 실제 그녀의 액션이고 또 어디부터는 그래픽이었는지 난 그런거 잘 모른다. 모두 그녀가 직접 만들어낸 몸짓들이라 믿을 뿐이다. 영화에서 얻은 영감과 교훈으로 덜 삐걱거리며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이며 살기 위해 어떤 운동, 어떤 습관을 시작해야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영화를 보고 들어와 급하게 서두른 건 스쿼트 삼십 개나 허리 스트레칭이 아니었다. 나도 그녀처럼 몸을 좀 써야되는데, 라는 글을 쓰기 위해 급하게 노트북을 펴는 일이었다. 노트북을 오가는 손가락의 움직임도 몸짓에 포함된다는 주장을 펼쳐볼까도 생각했지만 억지가 심하다. 


너나 나나 똑같이 팔다리가 두 개씩인데, 

우리는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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