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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Mar 09. 2019

그의 약상자

약의 효과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일까

며느리 고난주간, 시댁에서의 구정을 마무리 짓고 서둘러 친정으로 달렸다. 슬슬 두통은 시작되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인 설날, 가족들 먹을 음식 몇 가지 더 해놓고는 온갖 유세를 떨며 두통, 몸살, 피로, 목구멍이 붓고, 혓바늘을 호소하는 아내를 보며 남편은 별 말이 없었다. 이제는 서로 그러려니 하며 산다. 

머리를 싸매고 인상을 쓰며 도착한 친정에서 자리를 펴고 누웠다. 이제 나도 내 부모님 집에서 맘편히 몸살 좀 해보자 싶었다. 기름 냄새 그만 맡고 데일 듯 뜨거운 전기 장판에 몸을 지지는 것만으로도 두통은 훨씬 가라앉았고 몸살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그렇게 친정 온 티 좀 내고 싶었을 뿐인데. 

남편은 지극한 면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단점 백오십가지는 나열하지 않겠다. 그의 단점을 참고 살자고 맘먹은 이유는 아플 때 보여주는 지극한 면인 덕분이 큰데, 맘 잡고 아프기로 결심한 부인을 그냥 지나칠 사람이 아니다. 당장 약국으로 나서려는 걸 붙잡아 앉혔다. 오늘같은 날 어느 정신나간 약국이 문을 열어놓겠냐고, 약사들도 전부치고 몸살하는 중일거라고. 지금 나서봐야 헛수고만 한다고 붙잡아 앉혔다. 

믿는 구석은 있었다. 친정 아빠는 약을 좋아하고 약을 사랑하고 약을 아끼고 약 사는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다. 




어릴 적 기억나는 아빠의 대표적인 모습 중 하나는 약상자를 빈틈없이 관리하던 것이었다. 네모 반듯한 신발 상자 정도되는 종이 상자에 다양한 종류의 비상약품을 가지런히 정리하여 두통이든 복통이든 4남매의 왠만한 통증은 맡아놓고 해결하셨다. 시골에서는 왠만해선 병원을 잘 가지 않는다. 게보린 반 알이면 허다한 통증은 모두 잡혔고, 그도 안될 땐 사리돈이 등판했다. 썩은 이가 아파 잠을 못 이루던 초등학교 시절, 생리통으로 시험을 망칠까 걱정하던 중학교 시절, 가끔씩 괴롭히는 두통으로 힘들던 고등학교 시절까지 게보린과 사리돈이면 해결못할 일이 없었다. 


"은경이가 두통이 심하네요, 아버님 진통제 있으시죠?"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드러누워 환자 놀이를 하는 딸을 위해 등장한건 오랫만에 보는 아빠의 약상자였다. 요즘 아빠의 약상자는 어떤 모습일까. 친정에 들어서는 순간, 실은 이미 통증 따윈 없어졌었기에 오랫만에 마주한 아빠의 약상자는 안 그래도 그만 아플까 고민 중이던 딸을 휙 일으켜 세웠다. 요즘 아빠의 컬렉션이 궁금했다. 꾀병인 걸 들킬까봐 게보린 한 알을 먹고는 다행히 약효가 빨리 돈다며 슬며시 기운을 차리고 약상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릴 때 한 번씩 열어봤던 그 상자를 그저 한 번 열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릴 적 사진이 가지런히 꽂힌 앨범을 꺼내보는 느낌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노안이 온 건가. 약상자 속 약들의 포장지에 적힌 숫자들이 이상하게 보인다. 유통기한 2008.02.19. 다시 봐도 그랬다. 눈이 이상한건가 숫자가 이상한건가. 유통기한이 10년도 넘은 약이 발견되었다. 다른 약을 살폈다. 2007.09.15 더했다. 으잉? 약을 모두 꺼냈다. 하나씩 제대로 살폈다. 다행히 아직 노안은 오지 않았다. 내가 본 숫자는 정확했다. 가깝게는 3년, 멀게는 11년까지 다양한 세월만큼 유통기한이 훌쩍 지난 약들이 속속 발견됐다. 버릴 요량으로 옆으로 골라놓고 보니 남은 약은 좀전에 내가 먹은 진통제가 유일했다. 


"아빠, 이 약들 요즘에 드셨어요?"

"더부룩하면 소화제 챙겨먹고, 머리 아프면 두통약 먹고 쭈욱 잘 챙겨먹고 있던 약들인데 먹으면 또 효과가 엄청 좋아서 바로 통증이 없어져. 잘 낫더라."

"이걸 왜 안 버리고 여태 가지고 계시고 드시는 거예요?"

"숫자가 하도 작게 쓰여 있어서 날짜가 지났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으니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갖고 있지."


약의 유통기한이 지나면 약효가 떨어진다는 얘기는 정확하게 검증된 적이 없지만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약을 먹어도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으며 심지어 약효도 유효하다는 사실은 아빠가 몸으로 증명해버렸다. 이 십년 전의 진통제들은 지난해, 지난달, 지난주, 아빠의 몸에서 어떤 일을 했던 것일까. 




플라시보 효과라는 유명한 개념이 있는데 아빠의 약상자에 갖다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약효도 떨어지고 심지어 해로울 수도 있었을 십 년 된 진통제를 드시고 통증이 싹 사라져 버리는 일상을 살고 있는 아빠. 약으로 해결하지 못한 노안 덕분에 십 년 된 진통제를 의심 없이 챙겨 드시면서도 탈없이 건강한 일상을 유지하고 계신 아빠의 천진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약의 효과는 정말 마음가짐에 있는 것인가, 라는 희한한 결론에 도달했다. 신약 개발에 밤낮 없을 제약회사의 연구원들과 한 통이라도 더 팔아야 마땅한 월세 높은 1층 약국 국장님들에게는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나도 슬슬 노안을 핑계로 약의 유통기한 관리를 좀 느슨하게 해도 되려나 싶다. 


아빠의 약상자를 들여다보다 하도 깔깔 웃고 나니 두통 타령하기 민망해져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날 수밖에 없어 오랫만의 꾀병은 슬쩍 끝이 났다. 남편은 오래된 약들을 다 갖다 버렸고, 아빠는 허전해진 약상자를 들여다보시며 꼭 그렇게 다 버릴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고 아쉬워하셨다. 약 갖다 버린 사람이 다시 채워놓으라는 진심에서 우러난 부탁도 잊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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